춘추시대 초영왕의 삶
춘추시대 초영왕은 가는 허리를 편집적으로 좋아하는 기이한 취미가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허리가 굵고 큰 사람은 매우 미워했다. 궁이 완공되자 초영왕은 허리가 가는 미인만 선발해 거처하게 했는데 사람들은 궁 이름을 ‘세요 궁’(허리가 가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궁)이라고 부르기조차 했다. 많은 궁녀들이 초영왕의 눈에 들기 위해 허리를 가늘게 만들려고 배고픔을 참으며 허리를 졸라맸다. 심지어 굶어 죽으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궁녀까지 등장했다. 관리들은 조정에 들어갈 때 띠로 허리를 묶어 허리가 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초영왕의 증오를 모면하려 한 것이다. 나라 사람들도 허리를 가늘게 만드는 일에 매달려 유행이 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국적으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허리 다이어트 열풍’이 분 셈이다.
한비자는 “임금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신하들은 있는 그대로의 생각과 능력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면 임금은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히는 일이 없게 된다.”라고 했다. 초영왕이 ‘가는 허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자 온 나라가 왕의 마음에 들려고 가는 허리 열풍이 불었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의중을 뚜렷하게 드러내면 설령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측근들이 최고 권력자의 의중에 반하는 말과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호불호를 명확하게 계속하여 드러내면 낼수록 주변 사람들은 입을 닫고 눈치를 살피거나 최고 권력자의 호불호를 추종하기 마련이다. 가는 허리 이야기뿐 아니라 외교 관계에서 저지른 무례를 통해서 초영왕의 말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초영왕은 세요 궁을 완공한 뒤 여러 나라에 초청장을 보냈으나 아무도 가지 않았는데 억지로 약소국인 노나라 군주를 끌고 가다시피 했다. 초영왕은 노나라 군주와 마음껏 먹고 마시며 도취하여 창고에 보물로 보관하고 있던 활을 선물했다. 다음날 술에서 깬 초영왕은 활을 준 것을 크게 후회하여 신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신하가 노나라 군주를 찾아가서 임기응변으로 되찾아왔다.
제나라의 안영이 사절로서 초나라를 방문할 때 초영왕은 신하들에게 “안영은 키가 매우 작지만 현명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오. 열국 가운데 제나라가 가장 크고 번성하오. 과인은 안영이 오면 치욕을 안겨줘 초나라의 위엄을 과시할 작정이오. 경들에게 무슨 묘안이 있소?”라고 물었다. 계책을 낸 신하는 도성의 성문 곁의 성벽에 안영의 키에 맞게 작은 구멍을 뚫어 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제나라 사자가 오면 성문을 닫아걸고 저 구멍으로 들어오도록 하라.”라고 분부했다. 다음날 안영이 도착하자 성문을 지키는 군사가 구멍을 가리키며 “사자께서는 작은 구멍으로 출입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굳이 성문을 열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안영은 “저것은 개구멍이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다. 개가 사는 나라에 온 사자라면 개구멍으로 들어가겠지만 사람이 사는 나라에 온 사자는 사람이 다니는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다. 이를 지켜보던 내시가 곧바로 궁으로 들어가 보고하자 초영왕은 “내가 그를 조롱하려다가 오히려 조롱을 당했다.”며 곧 성문을 열어줄 것을 명했다.
안영이 사자로 가서 초영왕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무사 서너 명이 두 손을 결박한 죄수 한 사람을 데리고 전각 아래로 지나갔다. 초영왕이 “그 죄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한 무사가 “제나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또 “그 죄수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라고 물었는데 무사는 “도둑질을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초영왕이 안영을 돌아보며 “제나라 사람은 으레 도둑질을 잘하는 모양이오.”라고 말하자 안영은 왕이 자신을 조롱하려고 짐짓 그런 일을 꾸민 것을 알고 “강남에 있는 귤나무도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이내 탱자나무가 되고 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토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도 제나라에서 살았으면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나라에 와서 살기에 도둑이 된 듯합니다. 초나라의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제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초영왕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 후에야 “과인이 본래 그대에게 모욕을 주려 했는데 도리어 그대에게 모욕을 당했소.”라고 말했다. 안영은 초영왕으로부터 후한 예우를 받고 귀국했다.
상대국의 군주에게 활을 선물했다가 후회하여 돌려받은 일은 웃음거리가 되기에 족했다. 보통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인데 일국의 군주가 그런 행동을 했다니 한심할 따름이다. 안영이 사절로서 초나라에 갔을 때 초영왕과 신하들이 안영을 조롱한 일은 개구멍과 도둑 이야기 말고도 있다. 초영왕이 결국은 안영의 인격과 응대에 굴복하여 환대했다고 했지만 다른 나라의 사절에게 외교적 무례를 범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초영왕은 외국의 신하에게 모욕을 주거나 죽였는데 죽은 사람의 아들이 모의하여 일어난 반란에서 태자도 죽고 자신은 버림받아 홀로 헤매다가 옛 신하의 아들 집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정당성 여부를 떠나 초영왕은 반란을 자초했으며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는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살피고, 그 사람이 어떤 것에 만족하는가를 관찰한다면 그의 사람 됨됨이를 어디에 숨기랴, 그의 사람 됨됨이를 어디에 숨기랴!”라고 했다. 공자의 말처럼 초영왕의 비참한 말로는 이미 예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