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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송이 Jan 27. 2020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아"

내 상처에 가장 큰 치유제였던 선생님의 한 마디

'대학교 4학년을 어디서 보냈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대답의 교집합은 도서관으로 묶이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겹쳐진 동그라미 밖을 벗어나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학교 상담 센터'다. 


저보고 비정상이래요


2015년 봄, 나는 유럽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4학년 2학기를 시작했다. 학교 상담 센터에 상담 신청 메일을 보낸 것은 3월 3일. 신청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화요일에 공강이 많았나보다


저 주절주절 쓴 네 줄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비정상인 나를 정상으로 고치고 싶다'였다. 가족에게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엄마는 어느 날 '너 비정상이야'라고 단언했다. 그 순간 처음 알았다. 내 성격이 누군가에게 '비정상적'일 수 있다는 걸. 그렇게 순식간에 내 성격은 나의 특성이 아닌 고쳐야할 심각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문제를 고치고 다시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찾은 곳이 바로 학교 상담 센터였다.


상담 첫 날. 선생님을 기다리며 초조했던 마음이 여전히 생생하다. 1평 남짓 공간에 마주 앉은 쇼파, 커피 테이블, 그 위에 올려진 전자 시계가 전부인 상담실. 그 서늘함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안경을 낀 부드러운 인상의 선생님이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첫 시간은 본격적인 상담에 앞서 왜 나에게 지금 상담이 필요한지,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등의 기초적인 질문들로 채워졌다. 


잠시 후 나는 내가 방언이 터진 줄 알았다. 상담이 시작되자 걱정과 달리 그동안 혼자 일기장에만 끄적거렸던 것들이 줄줄이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대부분 마음 속에 오랜 기간 쌓여 있어 발효되기 직전의 감정들이었기에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종종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나도 모르게 내 입밖으로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내가 마음 속 깊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당황스러웠고, 낯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내 얘기를 털어놓는데 눈물은 또 왜그리 나던지.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아 꾹 참느라 목 안쪽이 내내 뜨끔하게 울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왠지 매번 이 커피 테이블을 눈물 콧물이 범벅된 휴지로 채울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아


나는 매주 금요일 오후 상담 센터에 들렀고, 예감은 적중했다. 나는 매 상담 시간마다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어릴적 상처들을 마구 토해냈다. 후련하기 보다는 서러웠다. 내 성격이 이렇게 되어버린 건 부모 때문이기도 한데, 왜 그들은 나에게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만 어서 노력해서 정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처럼 나를 코너로 몰아가는 걸까. 가슴이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벌게진 눈으로 코를 풀며 주절주절 마음의 상처를 털어놓을 때마다 선생님이 하는 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 그리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음이 어땠어요?", "그때 왜 그렇게 느꼈을까요?"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어느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 또 다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하지만 그 눈물을 결국 떨구게 하는 건 대답을 듣고난 후 선생님이 건네는 한 마디였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아."


상담을 하면서도 나는 불안했었다. 혹시 지금 이런 내 모습이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아이처럼 보이진 않을까, 상담에 의지하는 나약한 사람처럼 비춰지진 않을까, 끊임 없이 타인에게 비춰질 내 모습을 걱정하며 스스로를 검열했다. 그럴 때마다 매번 선생님은 작지만 강한 어조로 얘기했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다고. 그 순간 그렇게 느꼈다면 그 감정이 맞는 거라고. 내 상처에 공감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이상 나는 더 이상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누군가가 진심으로 건네는 공감은 내 상처의 가장 큰 치유제가 됐다. 


물음표에서 마침표로


상담을 처음 시작했던 시기, 내 일기장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차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감정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언제까지 상담을 계속 해야 할까?' 빈 벽에 공을 던지듯 나에게 던진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이 되어 끊임 없이 내게 돌아왔다. 나는 정말 비정상적인 사람인 건지, 이 상담을 통해 나아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막막하고 초조했다. 


하지만 상담이 끝나갈 무렵 내 일기는 조금 달라졌다. 


몇 개월 간의 상담을 통해 내 성격이 바뀌었다거나 삶이 변화했다는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표현에 서툴고 상흔이 오래 가는 내 모습 또한 내가 인정해야 할 또 다른 나임을, 상담실에서의 시간들이 그런 또 다른 내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그리고 상담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매주 마음이 아파 울면서도 끝까지 나를 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는 꽤나 용기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됐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학생회관 안에 있던 그 상담실을 떠올린다. 처음으로 상처투성이였던 내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나를 향한 타인의 비난에도, 스스로를 옥죄던 자기검열에서도 조금은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상담실에서 보낸 시간들의 의미는 충분했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대학생활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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