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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송이 Nov 04. 2019

"어떻게 사람이 항상 최선을 다해요"

내가 다시 병원을 찾게 된 이유

누구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오늘은 뭐 먹지?' 같은 일상적인 고민부터 제멋대로 꼬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인간관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부질없는 걱정 등등. 어떤 것들은 금세 사그러들기도, 때로는 밋밋한 일상을 조금 더 생기 있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간혹 어떤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마음 어딘가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 무게가 점점 무거워져 내 몸과 마음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깨닫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대학교 때 처음으로 교내 상담 센터를 찾아갔던 때가 2015년. 8학기를 다니던 24살 때다. 그로부터 4년 후, 대학교 중간고사 기간이 언제인지도 잊어버린 28살의 직장인이 되어 다시 병원을 찾게 됐다. 사유는 혹독한 이별.


이별을 겪은 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그 사람의 흔적에 멍해지거나, 햇살이 쏟아지는 길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리거나, 밥 한 숟갈 떠먹지 못한 채 침대에 산송장처럼 누워 있는 일들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뻔한 클리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나는 이별 후 한동안 위 세 가지 일들을 매일 반복하며 살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닥뜨린 이별이 이렇게나 사람에게 해롭다는 걸 28살이 되고도 반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렇게 울다 지쳐 겨우 잠들고 잠에서 깨어나 다시 우는 새벽들 속에서 나는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병원 문을 두드린 건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빈도가 잦아질 때쯤이었다. 나를 그 고통 속에 그대로 뒀다간 내 자신마저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더 이상 폐인이 된 내 모습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줘야만 했다. 내가 정신과 병원을 찾게 된 건 바로 그 때였다.


상담실 문을 열고 선생님과 처음 만났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의자에 앉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를 솔직하게 다 할 수 있을까? 3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내 마음을 어떻게 다 얘기하지? 아니, 근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하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머릿속 물음표와 달리 입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최근에 차였는데요, 다 제 탓인 것 같아서 너무 힘들어요."


나를 지옥으로 끌어내렸던 수많은 감정들 중 무엇이 가장 지독한 놈이었는지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자책감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날, 상대는 빠르게 식어버린 자신의 가벼운 마음의 책임을 나에게 돌렸다. 너무 늦었다고, 그동안 네가 했던 노력들은 나에게 너무나도 작은 것이었다고.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후회의 굴레 속을 끝도 없이 맴돌기 시작했다. 내가 왜 더 상대의 식어가는 마음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을까. 내가 왜 더 빨리, 더 많이 노력하지 않았을까.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기에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마음을 쉼없이 채찍질하며 빨간 생채기를 냈다.


자책감은 참으로 지독한 감정이다. 아무리 그 썩어버린 마음을 파내고 또 파내도 금세 또 다른 썩은 물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나는 매주 눈물콧물을 짜내며 그 지독한 감정과 싸웠다. 선생님의 말에 이자카야에 있는 고양이 인형마냥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가도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내 자신을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좀 더 최선을 다했으면 나를 그렇게 버리지 않았을 거라는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선생님이 전혀 예상치 못한 한 마디를 건넸다.


"어떻게 사람이 항상 최선을 다할 수 있어요?"


순간 멍해졌다. 아 그렇지,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 수는 없는 건데. 왜 나는 더 노력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었던 걸까. 심지어 나를 위해 같이 노력해주지도, 내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는 상대를 위해서. 나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상대의 몫이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수록 숨 쉬기 힘들 만큼 내 마음을 꽉 조여왔던 끈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하나라도 까먹을새라 메모장에 선생님이 해주신 말들을 적어내려갔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항상 최선을 다할 수 있어요?" 그 말 만큼은 굳이 메모장에 적지 않아도 될만큼 이미 내 허전한 마음 한구석에 선명하게 자리잡았다. 마지막까지 상대에게 최선을 다 하려고 했던 내 마음에게, 그 마음이 내팽개쳐진 후에도 내 자신을 탓하고 미워했던 나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집으로 가는 길, 정신 없이 내 마음을 찌르던 길거리의 커플들, 번쩍거리는 도시의 네온사인,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음악들 속을 지나며 생각했다. 그래, 언젠가는 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이 풍경 속에 녹아들 날이 오겠지. 그렇게 메모장에 적힌 희망들을 손에 꽉 쥐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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