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받았던 몇 가지 질문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남편 대현은 종종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아내 지영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볼 것을 조심스레 권한다. 대현의 은근하지만 거듭되는 권유에 지영은 '내가 그런 곳에 가야할 만큼 심각하냐'고 농담처럼 되묻는다.
여전히 한국에서 '정신과 병원'에 간다는 것은 어쩐지 내가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 같은 불안함과 불편함을 남긴다. '화병'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발병돼 한글 병명으로 불린다는 현실이 증명하듯, 우리는 아직 자신의 마음의 병을 인정하고 치료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영화 속 지영 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 그렇다.
그래서일까. 내가 몇몇 지인들에게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고 얘기하고나면 따로 연락이 오는 경우가 참 많다. 병원에 다니는 것에 대해 늘 궁금했지만 적극적으로 알아보기엔 어딘가 두렵고, 그렇다고 선뜻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답답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치 아침 TV 정보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한 정신과 의사마냥 성심성의껏 모든 질문에 온갖 tmi를 담아 장문의 답을 해주곤 한다. 그중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세 가지를 골라 정리해 보려고 한다. 주변에 온통 밝고 건강한 사람들만 있거나, 밝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만 있어 오늘도 네이버 지식인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을 이들을 위해.
1. 아니, 가서 도대체 뭐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그래서 도대체 병원에 가서 뭘 하는 거냐. 질문자의 예상 답안에는 1부터 5까지 점수를 매겨야 하는 수십 장의 설문지에 체크하는 일이나 흰 도화지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보세요'를 하는 일, 의사 선생님과의 역할극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적으로 발견하고 치유하는 모습 등이 있다.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정신과 병원을 찾게 된 이유도, 마음의 병의 깊이도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치료 방법도 모두 다르다.
나 역시 대학생 때 다녔던 학교 내 상담 센터와 정신과 병원에서 겪었던 과정이 조금씩은 달랐다. 상담 센터에서는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하기 전 나의 학교 신상정보와 상담을 신청한 이유 등을 일정한 형식의 신청서에 적어내야 했다. 상담 신청이 수락된 후에도 담당 선생님을 배정받기 전 꽤나 긴 설문지를 작성해 제출했다. 하지만 현재 다니고 있는 정신과 병원에 갔을 때는 나의 상태를 미리 적어내지도, 형식적인 설문지를 통해 내 마음을 자가진단하지도 않았다. 그냥 예약을 하고, 예약한 시간에 의사 선생님의 진료실 문을 열고, 선생님 앞에 앉아 곧장 내 얘기를 시작했다.
앞뒤 과정이나 상담 도중에 진행되는 치료법은 다를 수 있지만 언제나 같은 것은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지영이 병원에 찾아가 선생님 앞에서 그동안 겪은 일들과 그로 인한 자신의 마음을 가만가만 털어놓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지영은 아이와 함께 카페에 갔다가 '맘충'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순간 지영은 자신을 '맘충'이라고 지칭한 이들에게 다가가 '나에 대해 아냐'고 따져 묻는다. 지영이 카페에서 겪은 일을 가만히 듣고난 후 선생님은 지영에게 묻는다. 그래서 그때 지영 씨의 마음이 어땠냐고.
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대화가 내가 매주 병원에 가서 하는 일이다. 지난 상담 이후 내가 겪었던 일들, 그로 인한 내 감정들을 마음의 매듭을 풀고 하나씩 꺼내놓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 선생님의 역할은 그런 내 곁에서 내가 꺼내놓은 모나고 얼룩덜룩한 마음들을 같이 들여다봐주고, 인정해주고, 질문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당신의 마음이 어땠냐고.'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끝에 나도 미처 몰랐던 나의 모습이 손가락 끝에 닿을듯 가까워진다. 얼핏 보면 선생님과의 대화지만 실은 '나와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내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 병원에 간다라... 그렇다면 역시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뒤따라온다.
2. 그래서 얼만데?
지영은 대현의 거듭된 부탁에 못이겨 처음 정신과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그녀가 맞닥뜨린 것은 엄청난 양의 설문지와 35만 원이라는 검사비. 결국 그녀는 부담스러운 현실 앞에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려고 했던 삶의 무게를 다시 짊어진다.
흔히 정신과 진료비는 매우 비싸다고 알려져 있다. 나 역시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학교 상담센터를 무료로 이용할 수 없어 시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상담센터를 찾았던 적도 있다. (그곳엔 한 번 간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는다.)
실제로 1회 진료 비용은 4~5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보험이 적용돼 훨씬 저렴한 8~9천원 선에서 진료비를 해결할 수 있다. 나 또한 매주 상담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9천원 이내의 진료비를 내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내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30분이라는 시간에 전혀 아깝지 않은 돈이다.
3. 언제까지 병원에 가야 돼?
병원을 다녀야 하는 기간에 대한 질문도 꽤나 많이 받는다. 이는 나에 대한 걱정이 담긴 애정어린 질문이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병원을 다녀야 하는 시기에는 어떤 메뉴얼도, 정답도 없다. 마음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가는 곳이니 그 병이 나을 때까지 다니면 된다.
선생님께서 '이제 그만 와도 될 것 같다'고 말해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 내 마음이 어떤 모습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건 역시 나 자신이다. 처음에는 온통 너덜너덜해져 힘겹게 병원 문을 열었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마음의 명암이 한 단계씩 밝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스스로 깨닫게될 때가 온다. '나 이제 정말 괜찮구나.'
약 한 달 전 '다음에 또 필요할 때 찾아가겠다'는 말과 함께 병원 예약 전화를 취소했을 때의 기분이 여전히 생생하다. 용기를 내 병원에 가고, 상처에 허덕이고 있는 내 자신과 끊임 없이 대화하고,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며 보냈던 그 지난한 시간들을 무사히 지나온 내 자신에게 한없이 고마워 지하철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었다. 물론 고작 2주 후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다시 병원에 예약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지만.
지영은 과연 언제까지 병원에 다녔을까? 영화의 마지막, 자신이 쓴 글이 실린 것을 보며 환하게 웃던 지영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마침내 마음에 든 멍이 다 사라졌을 수도, 여전히 병원에 다니며 그 멍자국에 열심히 연고를 바르고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음에 또 이런저런 시련으로 마음에 멍이 들었을 때 그 상처가 더 빨리 아물도록 도와주는 곳이 있다는 걸 그녀가 몸소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지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지나온 것들보다 더 많은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련들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를 더 알게된 이상, 우리는 이전보다 조금은 덜 아프게, 그리고 더 무사히 시련 너머의 시간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