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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쨌든 Jul 17. 2020

개밥과 멸치

고속 성장 시대 중산층 음식 자서전 15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집에 바둑이가 왔다. 바둑이는 엄마 친구네 개가 낳은 다섯 마리 새끼들 가운데 제일 약한 녀석이었다. 엄마 친구네 가서 새끼들을 구경하던 우리 가족은 왠지 안쓰러운 조그만 녀석의 모습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녀석은 (갈색의 어미와 달리) 까만털과 흰털이 섞인 예쁜 바둑이였다.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인 우리집으로 온 바둑이는, 의외로 튼튼하(고 사납)게 무럭무럭 자랐다. 당시만 해도 서울엔 작으나마 마당이 있는 집이 꽤 많았고 집 안에서는 개를 많이 키우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 바둑이에게도 현관 옆에 지붕이 세모꼴로 된 개집이 따로 있었다. 


나는 녀석의 늠름하고 영리한 면을 특히 좋아했고 가족들 가운데 가장 예뻐해주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 몰래 방에 데리고 들어와 같이 놀거나 재우기도 했고, 추운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꼭 현관에 들여서 재우자고 고집을 부렸다. 어느 태풍이 불던 날, 그렇게 들여보내려 실랑이를 하다가 유리 현관문이 깨져 발을 다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또 당시까지만 해도 개밥을 사서 주지 않았다. 개는 인간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동물이었던 것이다. 우리집도 먹다 남은 밥에다가 된장국을 말아서 바둑이에게 주는 게 보통이었다. 개에게 염분이 있는 음식을 먹이면 안 된다는 것도 몰랐던 시절이다. 근데 그래도 우리 바둑이는 오래 건강하게 살았다... 잡종이어서 그랬을까?


여러 식구가 살면서 밥을 매일 해먹다보면, 모자라게 하기는 좀 그러니 음식을 넉넉하게 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늘 조금씩 남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드물게 아무것도 안 남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 엄마는 (늘 밥솥에 여분이 있는) 밥만 덜렁 나에게 주면서 물을 말아서 바둑이 갖다 주라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바둑이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서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들 중 육류(소시지, 치즈 등)를 꺼내 조금만 떼어서 섞어주면 안 되냐고 졸랐지만, 엄마는 “사람 먹는 거”라면서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멸치에 대해서는 엄마의 인심이 나쁘지 않아서 허락을 하거나 눈감아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바둑이에게 반쯤 몰래, 멸치를 자주 갖다주었다. 사실 우리집 냉장고에는 육류가 드문 편이었고 그래도 어류는 좀 있는 편이었지만 굴비나 그런 걸 통째로 갖다주기도, 좀 잘라서 내주기도 애매했는데, 마른 국물 멸치는 늘 냉동실에 넉넉하게 구비가 돼 있었고 바둑이도 잘 먹었다. 


하지만 그렇게 퍼나르던 멸치가 결국 냉장고에서 얼마 안 남게 되고 말았던 어느 날, 엄마는 얼마 전에 사놓은 그 많던 멸치가 다 어디로 갔냐면서 화를 버럭 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바둑이에게 주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다. 


유독 선명히 내 머릿속에 기억에 남은 그날도, 저녁식사 후 이상하게 잔반이 하나도 안 남았더랬다. 그래서 나는 하얀 쌀밥에 물만 말아다가 바둑이 밥그릇에 부어주었다. 사실 이미 밥그릇 안에는 바둑이가 전날 먹지 않고 남겨 놓은 희멀건 쌀밥이 그대로 퉁퉁 불어 있었다.


그러자 바둑이는 아주 슬픈 얼굴로 나를 우두커니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너무 기운이 없어 보여서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집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향해 돌진했다. 엄마가 막으면 정식으로 항의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부엌에는 엄마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살금살금 멸치 봉지를 뒤져 대여섯 개만 꺼냈다.


서둘러 바둑이에게 돌아가 흰 밥 위에 비쩍 마른 멸치를 쿡쿡 박아넣어 주었다. 간격을 골고루 적당히 띄워서. 바둑이는 그제야 집에서 나와 밥그릇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냄새를 조금 맡더니 생각보다 그다지 반기지 않는 기색으로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멸치 있는 부분만 갉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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