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쨌든 Sep 08. 2020

분식집 조카딸

고속 성장 시대 중산층 음식 자서전 18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사귄 친구가 분식집 조카딸이었다. 그녀를 처음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가 주장하는 대로 입학식 때 줄을 서 있다가 우연히 짝꿍이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녀와 학교에서 몇 번 마주치며 안면이 익어가던 어느 날, 그녀가 나를 콕 찍어 자기랑 학교 내 분식점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던 순간은 기억이 난다. 


당시만 해도 분식점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건 꽤 낯선 개념이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스무 살이어서 그랬을까? 식사는 학생 식당에서 식판에 잔뜩 받아다 먹고서, 분식점은 오후 네 시쯤 특별할 때 간식을 먹으러 가는 곳이었다. 과자로 적당히 때울 수 없는 허기가 밀려오거나 누가 한턱 낼 핑계가 생겼을 때 말이다. 


점심을 왜 분식점으로 먹으러 가냐는 나의 우려 섞인 반응에, 윤정이는 학내 분식점에서 자기 이모가 근무를 하고 있다고, 가면 잘해줄 거라고 했다. 나는 얼른 따라갔다.


매점 매대에서 윤정이는 식권을 떡볶이 하나만 달랑 끊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걸로 어떻게 점심을 하냐고 항의했다. 하지만 윤정이는 괜찮다며 음식 받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윤정이의 이모는 하얀 유니폼을 입고 하얀 빵모자를 쓰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떡볶이(식권)는 뭐 하러 샀어. 그냥 오면 내가 다 줄 텐데.”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윤정의 이모는 커다란 양철 쟁반에 한가득, 플라스틱 접시들에 담긴 분식을 내어주었다. 떡볶이, 순대, 튀김, 만두는 물론, 우선 순위에 밀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김치전과 쫄면, 호떡, 김밥까지.


매점의 탁자들을 고만고만한 메뉴로 메우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시선들이 좀 신경 쓰이면서도 윤정이와 함께 와구와구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그 후로 나와 윤정이는 절친이 되었고 자주 만났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점심에 만나 학내 매점으로 갔다. 이모님은 매번 아무 식권도 끊어오지 말라고 했고 윤정이는 꼭 뭔가 한 메뉴를 끊어갔다.


이모님이 내어주시는 음식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늘 우리가 다 먹기 불가능한 양을 골고루 차려주셨고, 우리는 늘 많은 양의 음식을 남겼다. 사실 누구라도 한두 명 더 데려가면 좋았을 것 같았지만, 왠지 윤정이도 나도 그런 제안은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분식을 먹으면서 주로 남들 험담에 해당하는 속내 이야기를 길고 깊게 나누었고 그런 시간에 누가 끼어드는 건 곤란했다.


또 윤정이는 왠지 다른 친구들에게는 이모님 특전을 잘 베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만 특별한 친구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뻐기며, “나 윤정이 이모님 때문에 매점에서 못 먹어본 메뉴가 없잖아.”라고 자랑하며, 나에게 특별한 단짝 친구가 있음을 과시하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 윤정이 없이 다른 친구들과 매점에 갈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은근히 기대하며, 혹은 반쯤 쭈뼛거리며, 식권을 두 개쯤 사들고 배식대로 갔다. 이모님은 나를 아주 모른 척 하지는 않았다. 내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면 "어엉.. 왔니?" 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는 한 가지 정도의 메뉴를 더 얹어 주셨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아싸~"였지만 약간의 서운함을 떨칠 수는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3의 데빌드 에그와 페이스트리 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