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짜릿한 바로 그 기분
번아웃이 심하게 왔던 때가 있었다. 첫 직장에서의 일이었다.
회사 생활은 매일매일 위기를 맞이하지만, 보통 홀수를 주기로 큰 위기가 찾아온다.
입사 1일 차 : 어...? 생각보다 일이 힘든데?
1주 차 주말 : 나 아무래도 월요일에 못 나갈 거 같은데
월급날 아침 : 이 한 몸 회사를 위해 불태우겠습니다!
월급날 저녁 : 내가 이 돈을 받자고 이 짓을 계속한다고..?
3개월 차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내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아
1년 차 : 이제 참을 만큼 참았어.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겠어
연말 보너스 입금 : 회사라는 게 어딜 가도 다 힘들지 않겠어?
2년 차 : 이제 배울 거 다 배웠어. 여기에 더 이상 미련은 없어.
2년 차 보너스 입금 : 엇... 이게 바로 애사심이라는 감정인가?
3년 차 : 내가 죽던지 회사가 망하던지 둘 중 하나다!
대충 이런 흐름으로 나의 첫 직장에서의 시간이 흘렀다. 번아웃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지만, 대개 첫 직장에서 찾아온다.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힘을 전부 소진할 때 발생하는 증상인 번아웃을 피하려면, 자기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끝없이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해소해나가면서 삶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리 없고, 주변에 많은 조언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첫 직장에서 번 아웃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 내 이야기다. 나는 3년 차에서 극심한 번아웃 증상을 겪었다.
내가 상당히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투덜대거나 짜증을 부렸고, 자꾸 뭔가를 잊어버렸다. 친구와의 약속도 잊어버리고, 메모를 해두면 메모를 한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취미도 사라지고, 책을 10페이지 이상 읽기 어려울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졌다. 이유 없이 화가 났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크게 맛을 느끼지 않았다.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가족에게 내가 화를 낼 때였다. 특히 어머니에게 쉽게 짜증을 부리게 된 나 자신을 인식하면서,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퇴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번아웃을 벗어나기 위해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정말 놀랍게도 회사를 그만두면 정말 빠른 속도로 치유된다. 내 경우는 3일 만에 돌아왔다(너무 빠른데).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그만뒀는데, 그 후에 아무 계획이 없으면 이제 할 일이 없다는 불안감으로 죽을 것 같았다.
계획의 실행 여부에 관계없이 다음 계획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떤 계획을 짜면 되는가? 뭐든 상관없다. 여행 계획도 좋고, 이직 계획도 좋다. 공부 계획도 훌륭하다.
내 경우는 대표님이 큰 도움을 주었다.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 같았던 건장한 체격의 대표님은 내 첫 사표를 보자마자 찢어버렸고, 나는 예상했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2장의 사표를 다시 내놓았다. 눈 밑을 파르르 떨며 나를 노려보던 대표님은 2장을 더 찢으면서 말했다.
"여기 나가봐야 다 똑같아. 나가고 싶으면 나가서 뭐 할 건지 나에게 설명해봐."
"그만두는데 이유가 꼭 있어야 합니까?"
"내 마음이야. 그만두기 싫어?"
"..."
권력의 부당함을 느끼고 주먹을 꼭 쥐며 사무실을 나온 나는 그날부터 성공적인 퇴사를 위해 온 힘을 다해 고민했고, 10년 전 대학 시절에 구상했던 계획까지 들춰내어 계획을 완성했다.
그리고 대표님 앞에서 나의 퇴사 후 '모터사이클 세계일주'라는 원대한 플랜을 프레젠테이션 했다.
강원도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로 넘어가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간다는, 지금으로서는 흔하지만 당시에는 허황된 계획이었다.
굉장히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약 15분 간 나의 치밀한 청사진을 들은 대표님은 말했다.
"돌았냐?"
"아니요. 진심인데요."
"미친놈이었네 이거?"
"... 빨리 수리해주십쇼.”
"어차피 6월에 간다며? 지금 2월인데?"
"저 다음 주에 2개월 동안 동남아로 배낭여행 갑니다"
"아주 작정했구나?"
"훗... 이거 보이세요? 이미 항공권도 샀답니다?"
이런 얼빠진 대화를 마지막으로 대표님은 혀를 차며 사표를 수리해 주셨고, 건강하게 다녀오라는 말을 해주셨다. 부서 사람들은 송별회 자리에서 무려 오토바이 헬멧을 선물해주었다. 감동의 눈물이 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옛사람들이 보고 싶어 졌다.
퇴사도 해볼 만한 경험일지도
당시에는 대표님이 그냥 억지를 부리는 줄 알았지만, 더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나름 나를 생각해주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아들이 나랑 동갑이라던 대표님 눈에는 3년을 못 견디고 뛰쳐나가는 내가 너무 무모해 보였던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나는 퇴사 후에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10개월 동안 바이크를 타고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고 다음 여정을 향해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한 번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게 되고, 더 큰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 같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데, 지금 첫 직장으로 돌아간다면 그때보다 10배는 더 편하게 일하면서 10배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퇴사를 결정함으로써 나는 이렇게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한 거..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