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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릴 Aug 05. 2020

세계일주를 다녀왔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그러니까 2015년 6월 말 즈음,

도저히 식지 않던 남자의 로망을 주체하지 못해 다 집어던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일주를 떠난 적이 있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헤치고 초원을 가로지르며 끝이 보이지 않게 곧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를 영국 밴드 오아시스의 노래를 BGM으로 깔며 주파하고 싶은 욕망이 10년 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 순수한 욕망의 부추김에 휩쓸려 자신을 던져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다 (뻥)


그래도 전부 다 뻥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로망 100%는 아니었고 현실도피 성향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밖에서 보기에 번듯해 보이는 직장에 사무직으로 다니던 나는 적당한 급여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고, 퇴사에 대한 욕망이 극에 치닫기 전에 보너스로 지친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근근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관련 회사들이 대개 그렇듯 워라밸은 극단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거대한 조직사회에서의 작은 톱니바퀴 신세인 것이 한탄스러워 알 수 없는 갈증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같은 느낌. 거대한 조직의 의사결정에 나의 지분이 전혀 없을 때 느끼는 허탈함. 그러면서도 일은 드럽게 많아서 퇴근을 일찍 못해 내 삶은 거의 없는 상황.


 쉬는 시간에 회사 옥상에서 이런 고민을 아버지 같은 부장님께(아들 이름이 나랑 같았다) 털어놓았더니 한심함에 애잔함을 섞어 아련함을 토핑 한 눈빛으로 나를 잠시 보시던 부장님이 나를 보고 던지시는 이야기


"야. 그냥 결혼해. 가족이 생기면 다 버틸 수 있어."

"누구랑요?"

"너 여자 친구 있다며?"

"얼마 전에 헤어졌잖아요. 저번 회식 때 위로주라고 사발에 말아서 술 주셨잖아요."

"...아"


부장님은 말없이 드시던 커피만 연신 들이켜셨고, 갑자기 커피가 매우 썼다. 저 멀리서 까마귀가 그렇게 슬프게 울었다. 나도 울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한 해가 가는 마지막 날, 나는 회사의 불을 마지막으로 끄고 나왔다. 경비실장님마저 나를 배신하고 먼저 퇴근하시던 그 날, 나는 새해 카운트 다운 순간을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보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망할 재물조사는 왜 매년 연말에 하는 것이며, 어째서 열흘이 넘게 치밀하게 준비하고 대비해도 당일에 오차가 발생하는 것이며, 이 크나큰 회사는 덩치에 맞지 않게 어째서 나사 하나, 손톱만 한 부품 하나에 그리 거품을 무는 것인가.  물론 진짜 몰라서 한 질문은 아니다.


아니 근데 진짜 솔직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회사고 뭐고 다 부셔버리고 싶은 순간에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일을 하는 것일까. 이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고 있는가. 정녕 이것밖에 답이 없는가. 정말 이대로 5년 후에 옆 자리 유 대리님처럼 탈모가 시작되고, 10년 후에 김 차장님처럼 무기력해지고, 20년 후에 윤 부장님처럼 부정맥으로 고생하게 된단 말인가.


갑자기 남은 인생 전체를 들여다본 느낌이 들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결말을 아는 소설처럼 지루한 책이 없는 법이다. 결심했다. 내가 여태껏 만들었던 나의 보금자리와, 그 보금자리를 보호하고 있던 울타리를 부수고 밖으로 나가보기로.


 바로 그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즉각적으로, 한 가지 아이디어가 기다렸다는 듯이 떠올랐다. 내가 10년 가까이 속으로만 생각했던 미친 짓. '오토바이'와 '여행'이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2가지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것.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것.


- 오토바이 세계일주였다.


 잠시 냉정한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나는 이제 30대다. 하루빨리 철이 들어야 할 때고, 불안정한 미래를 위해 열심히 재테크와 노후 대비에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때다. 요즘 세상에 취업도 어려운데 경력이 끊어진 30대가 다시 재취업하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너무도 뻔한 내 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보다는, 한 번 더 모험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어차피 떼돈을 벌 게 아니라면 뭘 하더라도 먹고 살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었다.


아 근데 그렇다고 지금 회사 정도 되는 곳은 이제 못 들어올 텐데. 그럼 일은 일대로 고되게 하고 박봉에 시달리면서 평생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건가으아아아아아아아


머리가 너무 아팠다.


혼자서 이랬다가 저랬다가 고민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근데 차고 구석에 서 있는 내 오토바이를 보았다. 잠시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괜히 시동을 한 번 걸어보았다.


- 부르릉


시동이 걸리면서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그는 그르르릉 하는 규칙적인 소리를 내뿜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상상되었다.


결심했다.


떠나기로.


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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