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처음 해보는 거라서
세계일주의 첫 번째 준비는 이실직고였다.
"저 여행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어디로 가는데?"
"여기저기 좀 많이 가려고요."
"회사에서 휴가 쓰게 해 준대? 너 그렇게 휴가 오래 못쓰잖아."
"회사 그만두려고요."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 잘 다니던 회사를 왜 그만둬? 얼마나 다녀오려고 회사까지 그만두는데?"
"한... 1년 정도?"
"뭐라고?"
"그리고 오토바이 타고 갈 거예요."
"뭐라고?"
"세계일주 할 거예요."
"뭐라고?"
대충 이런 대화였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처음 여행 얘기를 꺼낸 게, 이 말을 꺼내기까지 정말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뭘 하려고 한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아버지와 거리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에게는 이런 중대한 사안을 선뜻 말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었다.
아버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적잖이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그럴 것도 한 것이, 하나뿐인 자식이다. 거기에 회사는 대한민국에서 모두가 알지는 못하지만 전 세계에서 대부분 알고 있는 그런 독일계 회사. 급여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재정기반은 탄탄해서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정년까지 잘리기도 쉽지 않은 회사였다. 딱히 엄청난 지원을 해준 적이 없는 아들이 그렇게 자수성가에 가깝게 자기 입에 풀칠은 하고 사니까, 그 점이 또 꽤나 자랑스러우셨던 것 같다. 그런 아들이 갑자기 반쯤 미친 소리를 했으니 말문이 막힐 만도 했다.
차일피일 미루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털어놓고 나니, 그 후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아버지는 그 후 3일 정도 나와 대화를 하지 않았다) 몰래몰래 준비하던 걸 대놓고 준비할 수 있게 되니 속도가 붙었다. 바이크는 새로 살 생각으로 거의 한 달간을 검색하고 자료를 모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기종은 멀쩡한 컨디션이 없었고, BMW 같은 좋은 바이크는 예산 초과였다. 결국 이미 타고 다니던 녀석을 그대로 가져가기로 결정하고, 짐을 많이 싣고 갈 수 있도록 개조했다. 가지고 있던 바이크는 세계일주를 가기 전에 연습용으로 구매한 모델이었는데, 비포장도로를 좋아하는 평소의 취향 탓에 장거리 여행용이 아니었지만, 익숙한 게 장점이었다. 여정 중에는 산길이나 비포장도로도 많을 테니까, 생각해보니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었다.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들도 마구 사들였다. 월동용 장비, 캠핑 장비, 사계절용 옷 등. 정신 차리고 보니 바이크에 내가 타기도 전에 짐 무게만 거의 70Kg에 육박했다. 이대로면 출발도 전에 과적으로 바이크가 주저앉을 판이었다. 다이어트가 필요했다. 생존 장비나 바이크 장비를 뺄 수는 없으니 건드릴 부분은 옷 밖에 없었다. 3벌 챙겼던 바지를 2벌만 넣었고, 2벌 넣은 점퍼를 1벌로 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멍청했다. 여행하다가 필요하면 사면되는데 무슨 옷가지를 그렇게 많이 챙겼는지, 결국에는 여행 중에 버리고 사고를 반복해서 짐의 절반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 그걸 알리가 없었다. 앞으로 어떤 미지의 위협이나 상황을 마주할지 알 수 없었고, 불안감은 짐의 크기로 표출되었다. 80L 크기의 큰 방수백에 최대한 쑤셔 넣었다.
바이크용 장비도 엄청나게 챙겼다. 혹여 길바닥에서 고장이라도 날까 봐 펑크 수리 키트부터 시작해서 튜브, 오일필터 등 소모품을 최대한 챙겼다. 이 정도면 바이크가 두 동강이 나지 않는 한 어떻게든 고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챙겼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바이크를 10년 간 탈 줄만 알았지, 정비는 거의 할 줄 몰랐다. 어떻게든 뭐라도 배워야 했다.
몇 번 방문했던 동네의 바이크 수리센터에 무작정 들이닥친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창 반쯤 뜯어놓은 바이크를 수리하고 있던 센터 사장님은 내가 들어와도 본체만체하다가 내가 계속 쭈뼛쭈뼛하고 머뭇거리자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뭐 도와드릴까요?"
"저기, 바이크 정비하는 법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네?"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에게, 모터사이클 세계일주의 원대한 계획을 설명했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작 떠날 나보다 더 흥분한 센터의 사장님은 나에게 흔쾌히 기초적인 정비방법을 전수해 주었다. 펑크 난 바퀴 수리하는 법, 오일 및 필터 교체법, 타이어 교체하는 법 등등... 신이 난 사장님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알려주려 하셨고 나는 안간힘을 쓰며 머릿속에 욱여넣으려고 애를 썼다. 그중 가장 어려운 정비는 내가 단언컨대 타이어 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금속 재질의 주걱 2개로 온갖 기술을 시전(?)하여 타이어를 휠과 분리시키는데, 힘과 기술과 인내력의 삼위일체가 이루어져야만 성공적으로 교체할 수 있었다.
사장님은 처음 듣는 사람도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을 곁들이면서 약 20분 만에 뒷 타이어와 튜브를 교체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업계 경력 15년에 빛나는 사장님의 팔뚝에는 핏줄이 사정없이 튀어나왔고, 혼자 어디 가서 비라도 맞고 온 듯 땀으로 범벅이 되셨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장갑으로 훔치며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요, 처음 하시면 많이 어려울 수 있는데 몇 번 해보시면 익숙해지실 거예요. 직접 해보시겠어요?"
"아니요."
나는 반쯤 멱살 잡힌 채로 그 자리에서 타이어 교체 실습을 3번 연속해서 반복하여 연습했다. 고개를 드니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다음 날까지 앓아누웠다. 차라리 길 한가운데에서 타이어가 터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예산 편성도 필요했다. 여행은 많이 다녔지만 세계일주의 경험이 당연히 없는 나로서는 예산을 짜는 게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간단했다. 처음에는 국가별 평균 물가나 숙박비 등 인터넷에서 자료를 모으던 나는 금세 넘치는 정보로 인한 과부하로 두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고민 끝에 간단한 방법을 찾게 되었다. 교통비 등 미리 계산 가능한 고정비용을 제외한 총 여행자금을 대략적인 나의 총 여행일자로 나누어 1일 생활비를 정하고, 거기에 빅맥지수 등의 자료를 통한 아시아, 유럽 등의 지역별 물가 조정을 반영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총 여행자금 - 고정비용) / 총 여행일자 = 1일 생활비 -> 각 지역별 물가 조정반영(뭐라는거야 대체)
써 놓고 보니 더 이해가 어렵다.
예산 편성은 한 번 따로 정리해서 추후에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처음 모터사이클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강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이 의욕만으로 달려들었는데,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지만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나씩 하나씩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정말 내가 갈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말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그 힘은 반복할수록 강해졌다.
때는 6월 중순. 떠나는 날은 눈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점점 준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