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만 보던 서울의 미쳐버린 집값을 마주한 사회초년생의 이야기
나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가족들과 함께 살아왔다.
서울 마포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당시 공기 좋다는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를 온 뒤에 줄곧 엄마, 아빠, 언니, 남동생과 한 집에서 27살까지 자라온 것이다.
사실 고등학생 때까지 집 위치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떡볶이는 어디서든 먹을 수 있었고 공부하다가 답답하면 호수공원을 거닐었다. 영화관과 코인노래방도 집 앞에 있고, 독서실과 학원도 가까웠다.
하지만 대학교를 광진구로 결정짓게 되면서 나의 고달픔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롯데월드로 놀러 가지 않는 이상, 긴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본 적이 없던 나였다.
하지만 매일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만 왕복 3시간 이상 타야 했다. 그야말로 hell gate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지하철에서 화장도 하고 과제도 했다. 일산 근처에 사는 동기와 함께 수다를 떨며 등하교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정말 길고 길었다.
나의 새내기 시절 통금시간은 11시였다. 한창 재미있을 대학교 1학년, 1차를 끝낸 그 술자리에서 나는 항상 9시면 일어나야 했다. 물론 주구장창 자취를 주장했지만, 부모님은 '출가'하지 않는 이상 독립은 없다고 선언하셨다. 당시 경제력이 없던 나는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해를 거듭하며 과제와 MT, 시험기간 찬스로 외박 횟수를 점점 늘리긴 했다)
결국 단 한 번의 자취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나서야 집밥이 최고이고, 집에 돌아오면 말끔하게 정리되어있던 내 방에 감사함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집이 에버랜드 근처의 한 용인 신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어 반강제적으로 독립을 해야만 하는 시점이 와버렸다. 회사는 여의도에 있고, 만약 이사 갈 용인 집에서 통근을 하게 되면 넉넉하게 5시간은 잡아야 했다.
부모님이 이사를 선언하신 곳은 정말 '신'도시라 지하철이 없고, 에버라인에서 아파트 셔틀버스를 타야 단지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살던 우리 집을 부동산에 전세 내놓고 나도 홀로 독립할 '나의 집'을 차근차근 찾아보기 시작했다.
주변에 알아보니 직장인은 전세자금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일정 연소득과 연령 등의 기준에 맞으면 누구나 전세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을 구하기 위해 전세자금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이미 혼자 살고 있는 세대주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잠시 세대주가 되어야 했다. 수도권의 경우는 1억 2천만 원까지(집값의 7~80%까지 가능)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나라가 그렇게 살기 힘든 나라는 아니구나라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직장이 여의도인 나는, 여의도에 살면 참 BEST라고 생각을 했지만 여의도의 집값은 참 비쌌다. 그전까진 '이 집은 얼마일까?'라는 생각은 잘 안 했는데,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집값이 건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나의 후보군은 홍대권(상수, 망원, 합정)과 영등포권(영등포시장, 영등포, 문래) 이렇게 크게 2개 지역이었다.
우선 예산은 최대 1억 원으로 제한했다. 대출액에 부담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직방과 다방에 예산과 지역 필터를 걸어 열심히 리스트업을 하고 둘러보기 시작했다.
독립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더 깨닫게 된 것은 인터넷은 정말 정보의 보고라는 것이다.
'자취방 구하는 TIP' '랜선 집들이'등 독립 선배들의 후기가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많이 참고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1. 방음이 잘되는 집을 확인하려면 벽을 두들겨 보기
2. 낮과 밤 모두 집을 방문해볼 것
3. 변기 물과 샤워기는 꼭 틀어볼 것
4. 집을 보면서 동영상을 촬영해둘 것
이중에서도 나는 동영상 촬영해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집을 둘러볼 경우, 괜히 마음이 급해서 빠르게 둘러보게 된다. 특히 보러 간 집에 누군가 살고 있을 경우에는 더하다. 다시 그 집을 보고 싶다면 부동산 중개인 -> 집주인 -> 건물 관리인 등의 순서로 확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한 번 볼 때 꼭 동영상 촬영을 해두어, 그 집의 구조와 비치된 옵션을 꼼꼼히 다시 확인하기 좋다.
메모만로는 절대 기억이 안 난다.
직방과 다방으로 '찜'해놓은 집은 부동산을 통해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았다. 토요일 하루를 통째로 비워놓고, 집을 돌아보고자 부동산 4곳과 예약을 잡았다.
하지만 부동산 1곳 외에는 당일날 매물이 다 나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간신히 만난 부동산 중개인에게 물어보자,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주는 집주인이 많이 없다고 했다. 집주인 측에서 확인해줘야 하는 절차와 서류들이 있어서 '귀찮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차를 타고 오피스텔과 빌라들이 모여있는 한 곳에 도착했다. 첫 번째 집은 1층 복도부터 문들이 촘촘히 붙어있는 고시텔 같은 건물이었다.
문을 열자 바로 주방이었다. 신발장 왼쪽에 주방이 있는 것이다. 기승전'결'이 아닌 기'결'인 느낌이었다.
이집이 무려 전셋값 1억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화려한 거울이 보였다. 모텔에서나 볼법한 저 거울이 거슬렸다. 하얗고 좁은 이 공간이 기숙사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정이 가지 않았다. 나에게 정말 큰돈인 1억을 2년 동안 집주인에게 맡겨놓아야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집도 역시 외관은 비슷했다. 오피스텔, 빌라가 밀집되어있는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어느 남자분이 혼자 살고 있다는 두 번째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말에는 본가에 가시나보다. 빨래를 널어놓아서 그런지 습기가 가득 찬 꿉꿉함이 밀려왔다. 5평이라는 아담한 방 사이즈와 촌스러운 초록 빛깔 서랍과 꽃무늬 벽지. 세면대 일체형 샤워기. 그래도 이 집은 8,500만 원이었다.
이 집은 옷장이 따로 없어서 최소한의 짐만 가져와야 했다. 8,500만 원이 저렴하게 느껴지는 상대성 마법. 하지만 내가 이 집에서 산다는 상상을 해봤을 때 주말이면 집 대신 카페에서 여가시간을 보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홍콩의 '맥도널드 난민'이 떠올랐다. 하지만 가격적 메리트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 날의 마지막 매물이라던 세 번째 집으로 향했다. 중개사분이 1억짜리 전셋집이 있는데 혹시 보겠냐고 물어보셨다. 내 예산의 최고치 집이었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문을 열자 가장 아늑한 집이 나왔다. 지금까지 본 집중에 가장 집 같은 집이었다. 7평짜리 집이었고(하지만 관리비를 계산할 때는 공용 평수까지 합해진 11평을 곱한다..) 2002년에 지어져서 낡았지만 관리가 잘되어있다고 했다. 다만 내가 본 방은 3층짜리었는데 바로 앞에 주차장 건물이 있어서 해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낮에 집에 있는 시간이 적고, 커튼을 치고 살면 되지'라는 생각으로라도 이 집에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괜히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인상이 좋아 보이던 관리인 아저씨께 '괜찮을까요?'라고 여쭤보니 예상외로 아주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차가 올라가거나 내려갈 때, 시끄럽기도 하고
진동 때문에 방이 좀 흔들릴 거예요
허허 너털웃음만 짓던 나는, 관리인 아저씨가 다행히도 집 8층에 공실이 있다고도 말씀해주셔서 올라가 보기로 했다. 8층은 1억 3천만 원이었다. 3층과 8층, 그 5층 차이가 3천만 원인 것이다.
3층에서 보았던 주차장 건물보다 반층 정도 높은 덕에 다행히 햇빛은 받을 수 있었지만, 가격이 부담되었다. 1억 원은 대출받기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의 고민을 캐치한 중개인이 1억 2천에 결판를 보면 바로 계약을 할 것이냐는 딜을 해왔고, 나는 그 자리에서 콜을 외쳤다.
살림살이는 미리미리 준비해놓라는 엄마의 지휘 아래, 나는 열심히 살림살이 리스트를 작성하고 가성비 좋은 생활용품들을 묶어 엑셀표로 만들었다. 주요 쇼핑몰은 쿠팡과 이케아였다.
핫하다는 규조토 매트와 이케아 조명을 장바구니에 넣고 틈틈이 결제를 했다. 생전 내 돈으로 사 본적 없는 것들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하게 우리 집에 있던 물건들이었고, 항상 엄마 아빠가 사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 새삼스레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떠오름과 동시에 결제 가격에 대한 부담도 다가왔다.
몇 천 원짜리 커피는 매일 사 먹으면서도 두루마리 휴지는 몇 백 원 차이로 더 저렴한 걸 고르는 내 모습이 위선적이기도 하고, 집에서 가져갈 수 있는 다리미나 접시/그릇들을 하나씩 찜해놓기도 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이삿날이 왔다. 이사 3주 전부터 이미 나의 이삿짐은 산더미를 이루었고, 그 절반은 옷이었다.
그리고 새로 구매해야 했던 테이블과 의자 등은 DIY 제품으로 주문했다. 가격과 퀄리티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달차 아저씨가 조립을 해주셨고, 아빠와 나는 염료를 먹이고 그럴듯하게 꾸몄다.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옷 무더기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나서 배달음식을 먹은 것을 끝으로 이사를 마쳤다. 쓰레기도 모두 내다 버리고 나니 비로소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모두 집으로 되돌아가신 후, 홀로 잠을 청해야 했던 그날 밤은 어딘지 모르게 울고 싶어 졌다.
이 공간에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과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을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구나라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