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초능력에 관하여
잠들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이가 자기는 3초면 깜빡 잠에 들 수 있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초능력”을 가졌다며 부러워했다. 흘러간 농담이지만, 여전히 잠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에게 있는 어떤 힘의 증거라고 믿는다. 그것은 누구라도 매혹할 수 있는 단단한 눈동자가 지닌 것과 같은 종류의 힘이다. 사전이 가난한 탓에 단어가 모자란 나는 그 힘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도 늘 포기해야 했다. 다만 그녀가 매일 밤 위대해지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뿐.
인간은 오랜 시간 자기 동일성에 관해 물었지만 자신이 매일 밤 미결된 질문 위에서 도박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했다. 잠이 바로 그 도박이다. 누군가 잠들었다 깼을 때 어제까지의 의식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일 수 없다. 그러니까 잠들기 직전에 우리는 항상 내일의 나를 담보로 내기를 강요받는 것이다. 도박을 피할 수는 없다. 밤중에 집을 나가 떠돌던 내 의식이 아침과 함께 무사 귀환하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경험, 집 나간 의식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경험을 해본 적 없다는 사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굴러들어 온 의식이 몸을 강탈할 때, 마치 자신이 쭉 그 몸의 주인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조작된 기억을 들고 들어오는지 누가 아는가?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나는 <아일랜드> 속 클론들처럼 말이다.
잠이란 매일 찾아오는 의식의 죽음이다. 아무리 잠을 피하고자 발버둥 치더라도 육신은 그 노도를 두고 보지 않는다. 누구라도 몸이 요청할 때면 언제든 침대로 불려 가야 한다. 그리고 잠들어야 한다. 따라서 잠들기로 마음먹는다는 것, 의식의 표층에서 잠을 의욕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건 잠이 이렇게 도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절박한 요청에도 늑장을 부리고 사회의 약속을 의심한다. 오늘처럼 내일도 있으리라 달래는 나의 기억조차 의지할 데가 못 된다. 세계 어디에도 내일의 나를 위한 약속은 없다. 잠은 늘 도박이고 위험천만한 모험이다.
<Adventure time with Finn and Jake>라는 미국의 만화영화에는 이와 같은 잠의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보통의 로봇들과 달리 재미와 놀이를 이해하도록 만들어진, 로봇 ‘이상의 존재Be More’라는 뜻에서 ‘비모BMO’라 불리는 캐릭터가 스스로 배터리를 교체하는 장면이다. 배터리를 교체하는 일은,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에너지를 재공급하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인간의 잠과 비슷하지만, 이 로봇 캐릭터가 그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 역시 인간의 잠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새로운 배터리를 장착하기 위해 BMO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닥에 배터리를 잘 놓아두고 그 위에 쓰러지는 것뿐이다. 쓰러지기 직전에 기존의 배터리를 제거하기 때문에, 바닥의 배터리 위치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었거나 넘어지는 도중에 몸을 삐끗한다면 그걸로 이 로봇의 생명은 끝이다. 무언가 잘못되더라도 몸을 가누어 조치를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방식을 취할 수는 없다. 등 뒤에 배터리를 장착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이 방식으로만, 즉 의식을 잃는 방식으로만 그는 의식을 지속하는 과정으로서의 잠에 들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그저 일이 잘 풀릴 거라 믿고 허공에 몸을 맡겨야 한다. 운이 좋다면 배터리가 잘 장착되어 프로그램이 재가동될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영영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을 것이다. 밤마다 우리가 벌이는 도박과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BMO의 표정과 행동 어디에도 주저함이 없다. 거침없이 쓰러지고 씩씩하게 일어설 뿐이다. 심지어 어딘가 신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가 “재미와 놀이를 이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도박’을 우리말로는 뭐라고 하는가? ‘놀음,’ 즉 놀이라 한다. 인간이 신경과학에 힘입어 뇌와 수면에 관해 아무리 통달한다 하더라도 잠으로부터 도박의 성질을 제거하는 데로 나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은 의식 이후에, 의식 안에 주어진 존재자들의 법칙과 구조에 천착할 뿐이니까. 잠 자체, 다시 말해 의식이 알 수 없는 이유에서 반복적인 단절을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 자체는 잠 이후에 출현하는 의식 안에선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근원적 사태다. 어쩌면 여기서 로봇 이상의 존재로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잠이라는 위험천만하고 엄중한 도박을 한낱 놀음으로 깔보는 것뿐일지 모른다. 이 무모함은 동시에 용기다. 잠들기로 마음먹을 수 있는 용기. 그것만이 계산과 확신이 철폐된, 침실과 꿈 사이의 경계에서 하나뿐인 선택지를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요컨대 잠들기로 마음먹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두고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이 이야기를 그녀와 BMO가 듣는다면, 꿈보다 해몽이라며 머쓱해하지는 않을까?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럴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두 번째 이유를 멈추지 않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의 머쓱함과 황당함은 나의 해몽을 틀린 것으로 만들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특별함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잠깐 우회해보자. 우리는 언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가? 언제 우리의 문학적 찬사와 철학적 의미 부여가 정작 당사자들에 의해 회의의 대상이 되곤 하는가? 이런 일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은 아마도 예술에서 창작의 영역과 비평의 영역이 은근히 내외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일 것이다. 비평가가 자신을 귀속시키는 장르의 절대적 이념 같은 것을 상정하고 모든 개별 작품을 그 절대성의 불완전한 현실태로 간주하는 일을 그들의 사명처럼 여기지 않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부정성보다 더 근원적인 힘에 동기를 얻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작품을 함부로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작품은 물론, 작가에게까지 되돌려 보내곤 했다. 그 시절 비평은 허락받지 않은 연애편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작가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었고 모든 해석을 독자의 몫으로 돌리며 자신의 의도와 창작 과정을 신비 속에 남겨두고 싶어 했다. 사랑 고백보다 교조주의적 평가와 판단이 쉬워진 데는 이렇게 반복된 거절의 역사가 있다.
하지만 작가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말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용수의 춤사위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가 춤추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을 때, 소위 무아지경에 있을 때가 아닌가? 폴록의 물감이 작가의 철저한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가정하는 만큼만 미학적 의미를 허락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오래된 철학적 문제가 저 아래서부터 제기되고 있다. ‘행위하는 자는 말할 수 없고, 말하는 자는 행위할 수 없다.’ 프랑스에서 이 문제가 가장 부각된 것은 실존의 시기였다. 희생자와 영웅들 앞에서 말하는 자들, 즉 문학과 철학이 어떻게 그들의 본적을 발급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 너무 멀리 가지는 말자, 여기는 우회로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잠 앞에서 의식의 불확실성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만큼 그들이 찬사와 애정 고백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얼마간 자신을 바라볼 수 없는, 무아無我에 있는 이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잠들기로 마음먹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잠든다. 결심과 행동 사이에 가정되었던 필연성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면 문학과 철학은 거기서 시작된다. 잠들기로 마음먹는다는 것과 정말로 잠든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자가 그들의 용기를 말해준다면 후자는 그 용기가 그들의 살 거죽에 힘없이 들러붙어 있는 장식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존재 양식임을 알려준다. 그들에게 모험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동의어다.
나는 9월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9월생이라는 사실을 안 뒤로 내가 태어날 시간을 착각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여름 뒤에, 겨울 앞에 기죽지 않고 들어서서 존재 자체를 모험이자 과정으로 만드는 그 시간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매일 밤 위대해지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뿐이다. 언제나 내가 의심하는 내일에 그녀는 이미 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