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의 의무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사강의 유명한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시몬이 폴에게 하는 말이다. 시몬의 다소 격앙된 과장을 받아들이자면, 사랑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는 일은 일종의 인간 된 도리이다. 행복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사랑을 놓친다. 심지어 사랑이 끝까지 우리 곁에 남는 일보다는 기어코 우리를 스쳐 지나가 버리는 일이 훨씬 자주 있는 것 같다. 기회의 신은 뒤통수가 대머리라 했던가?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랑이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두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찾아왔을 때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겠지. 고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있는 힘껏 사랑을 규정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시작하기도 전부터 마치 교과서를 읽는 듯 영혼 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랑은 결코 규정할 수 없는 것…' 하지만 이 목소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사랑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라 해도, 그 결론은 규정하고자 하는 노력 이후에만 정당하다는 것. 실패해보지 않은 자에게 실패에 대해 말할 무슨 대단한 자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완전히 규정하고자 기꺼이 노력할 것이다. 감히 몇 가지 규준들을 나열할 것이며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단호히 구분할 것이다. 이런 측면 때문에 이 책은 누군가에게 모욕적일 수 있고 불경스러울 수 있으며 잔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진리가 본디 폭력적이라 믿는다. 아무것도 전복할 수 없고 아무도 공격할 수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책이 당신에게 상처를 낸다면, 소용없는 사과 대신 하나의 각오를 드린다. 나 역시 진리 앞에 상처 받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또 나는 이 책이 철학적이기를 바란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첫째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이 무언가를 전복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쓰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우리 사랑은 매분 매초 위기에 처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심리적 위기가 아니다. 우리 사랑이 평화롭고 안정적일 때면, 심리적 위기는 말끔히 사라질 수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떤 개념적 위기이다. 사랑은 매 순간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을 강요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혹은 '지금 이것은 정말 사랑일까?' 이 물음들은 평화와 행복의 순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더 소용돌이치며 우리를 잠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사랑의 개념을 지키거나 파괴하도록(그리고 새로 창조하도록) 내몰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랑을 규정하려는 이 책의 노력이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모든 문장이 무기로 쓰이기를 희망하며, 무기로 쓰일 수 있는 사랑의 개념을 발명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어떤 문장도 자기 계발서의 실용적인 지침이나 교훈 같은 것은 되지 못하리라.
두 번째로 이 책이 철학적이기를 바란다는 말은 추상적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나는 철학을 일반화된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실재를 위한 것으로 만들었던 들뢰즈를 따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이 개념적 사유의 기록이면서도 실제 삶에 최대한 밀착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사랑에 대한 일반론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해석하기를 소망하는 것, 정신을 빼앗긴 듯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구체적인, '바로 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서 가능성에 의존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쓸 것이다. '바로 이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가능성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사랑이 제기하는 물음에 '이런 사랑도 있을 수 있지'라는 식으로나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은 대답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목적은 너무 두루뭉술해서 사실상 무한한 외연을 지니게 되는 사랑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필연적 규정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유는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경험이 이끄는 필연적 귀결로 나아가야 한다. 느긋하게 사랑이 어떤 것들일 수 있는지를 연상하는 일은 사랑이 무엇인가 묻는 이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장르는 에세이요, 분야는 철학이다. 그리고 사랑은 이제부터 보게 될 여러 편의 에세이들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관통하는 하나의 문제이다. 이 글을 읽는 이가 있다면, 굳이 서론을 위한 페이지들을 마련하여 내가 밝히고자 했던 것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한 구체적이고 폭력적인 진리를 향하여 쓰였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