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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솔 Mar 19. 2019

랍스터와 여왕과 사랑

<더 랍스터>2015,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9

* 자세히 묘사했으므로 스포일러일 수 있습니다.

영화 <더 랍스터>를 감상했었다

공통점이 있어야 짝을 만날 수 있고 일정 나이까지 짝을 못 만나면 동물로 변하거나 죽어야 하는 규칙의 가상 미래 사회가 배경이다. 그 사회의 사람들은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통점을 가진 상대를 찾는다. 동물처럼. 


여남 주인공은 근시라는 조건이 맞았다. 드물게 서로를 진실로 좋아하기까지 했지만 이들을 질투한 누군가에 의해 여자는 실명됐고, 공통점이 깨졌으므로 합법적으로 사랑하려면 남자도 어떻게든 실명해야 했다. 남자가 거울을 보며 뾰족한 것을 천천히 눈에 갖다대는 장면이 점점 클로즈업 되며 영화는 끝났다. 찌를까 말까 볼 때마다 긴장되는 엔딩은 그러니까 질문이었다. 


규칙을 지켜야 숨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니 당당한 삶과 사랑을 위해 스스로 시력을 포기했을까? 어차피 여자는 눈이 안 보이고,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하니 본인도 장님이라 속이고 안 찔렀을까? 아니 공통점을 만들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모습으로 같이 살아갔을까?  


사랑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어 상(삶)과 벌(죽음)을 주었을 때 못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꽤 인상으로 남았다. 동물로 변하는 일이 인간으로서 죽는 것이라면, 그래서 두렵다면, 자유를 뺏긴 사랑으로 부지하는 생은 인간적일까? 사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남주인공이 희망 동물로 적은 랍스터로 변하는 게 낫다. 지금부터 100년을 추가로 살 수 있으며 귀족의 푸른 피를 가지니까.


나는 오래전부터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그렇게 좋았다. 답을 받아들이기보다 찾는 과정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여겨서다. 언제나 그렇듯 영화가 끝난 뒤 진짜 영화가 시작되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다음 영화가 궁금했다. 재미나고 진중한 물음이 또 들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      



몇 밤 전에 감독의 신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봤다

이번엔 18세기 과거 사회 배경이었다. 기깔나게 히스테릭한 영국 여왕의 총애와 권력을 얻으려는 두 레이디의 정치질 이야기다. 


레이디 중 한 명인 사라는 여왕과 오랜 친구이며 가장 애정 받던 자였고 에비게일은 하녀로 왕실에 들어왔으나 점점 여왕의 신임을 얻어 신분 상승 중이었다. 정치와 권력 싸움에 여자가 앉아 있는 모양이 활기찬데다 니콜라스 홀트가 꽤 귀엽게 나오길래 영화를 오락처럼 즐기던 중이었다.


에비게일은 새롭고 달콤하게 여왕을 홀렸다. 새로운 여자의 출현으로 여왕의 방에 출입 금지까지 당한 사라는 왕실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엄포를 놓았다. 여왕은 사라에게 에비게일처럼 본인을 사랑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사라는 여왕에게 외쳤다.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라고요? 에비게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오,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처럼 아름다운 우리 폐하~' 아니요. 당신은 가끔 오소리 같이 생겼어요. 내 말을 들어야 해요. 난 거짓말 안 해요. 그게 사랑이니까.” 


사라의 말을 계속 읊조렸다.

당신은 가끔 오소리 같이 생겼어요. 난 거짓말 안 해. 그게 사랑이니까.

그게 사랑이니까. 그게 사랑이니까. 그게 사랑이니까···


그 순간의 사라의 마음을 짐작하는 게 너무 혼란스럽고 좋았다. 

사라가 여왕을 진실로 사랑하나? 사랑했었나? 사랑이었다는 걸 몰랐다가 깨달았나? 권력을 향한 욕망이 사랑으로 번져갔을까? 가질 수 없는 데서 오는 심술을 사랑으로 착각한 걸까? 


아니 그 모든 게 사랑이지. 모든 감정이 사랑을 향하진 않지만 사랑은 모든 감정으로 흐르니까.



아비게일은 여왕을 사로잡아 목표하던 것들을 이뤘지만 사라 말대로 달콤한 거짓으로 얻어낸 게 좀 있었다. 여왕 옆자리를 완전히 차지하게 되자 그녀는 전처럼 구애에 애쓰지 않았다. 뭘 해도 아낌 받는 존재가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왕은 그런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므로 에비게일에게 수치를 주며 본인에게 언제나 복종하고 사랑을 아낌없이 바쳐야 함을 확인시켰다. 자세를 낮추고 여왕의 다리를 주무르며 에비게일은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영화는 끝난다. 


 <더 랍스터>에서는 사랑의 자유를 제한하자 자유의 사랑을 갈망하는 연인이 생겨났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는 자유롭게 사랑을 부릴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있는 여왕이 누구보다 사랑에 구속되길 원했다.


다양한 모양의 사랑을 떠올렸다. 금지가 많은 관계는 뒤틀린 사랑을 낳기도 하지만 원하는 바에 따라 합리적인 사랑을 할 수도 있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사랑은 황홀하고 폭발적이지만 그만큼의 공허를 감수하는 경우도 생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에게 랍스터와 여왕을 통해 사랑이 지닌 의문과 모순을 실험 중인 거냐고 묻고 싶다. 반짝이는 눈빛과 꼭 모은 두 손과 함께. 이 글에 거짓은 없다. 그게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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