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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솔 Apr 23. 2019

윤동주의 시는

<동주> 2016

영화 <동주> 스틸 컷

아픈 시대의 한 청년이 시인이 된 순간들을 지그시 독서하였다. 영화 <동주>는 연필로 쓰인 시집 같다. 송몽규가 강단 있는 표정을 지을 때 진한 4B 연필이 가루를 내며 명암을 그렸다. 윤동주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을 연한 4H 연필이 예민하게 움직였다. 이 영화가 흑백인 것은 자연스럽다. 나의 몸, 나의 혀, 나의 노래, 나의 말, 나의 글, 나의 가족, 나의 동네, 친구, 선생, 동료, 의지, 생각, 정신이 침범 당하는데  펜을 딸깍이며 나라를 칠할 수는 없다. 뭉툭해지고 지워져도 깎으면 나오는 흑연으로 쓰인 불굴의 시대. 그것이 동주가 산 세상이다.



칼로 한번에 목을 따는 것도 괜찮지만 샤프로 뒷덜미를 쿡 찌르는 것은 더 예상하기 힘들고 치명적이다. 약탈과 지배를 일삼는 들에게 저항 외침이 담긴 시는 후자와 같은 공격이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유약한 사람이 아니다. 히라누마 도쥬의 이름으로 우리말 시를 쓰는 행위는 날카롭고 용감하다.



영화에서는 일본인 쿠미가 동주에게 직접 시집을 받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출판을 돕는다. 실제로는 더 많은 이들이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시를 살렸다. 연희전문 동창 강처중은 '참회록' 등 5편의 시를 땅 속에 묻어 지켜냈다. 누이동생 윤혜원은 남편과 북간도 용정에서 서울까지 동주의 어린 시절 시를 짊어지고 왔다. 절친 정병규는 시집을 보관하다가 광복 후 간행해 세상의 빛을 보게 하였다. 그가 살았을 때를 잠깐 다녀오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출판 비용 300원이 없어 시집을 출간하지 못한 윤동주에게 당신의 글들이 얼마나 값진지 보여드리고 싶어서다. 그럴 날을 시대(時代)처럼 기다리는 최후의 나.



쉽게 쓰여 부끄럽다던 시를 죄목으로 시인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끌려간다. 고향 짐을 싼 바로 다음날이었다. 동주와 몽규는 그곳에서 의문의 주삿바늘을 맞아가며 심문을 당하였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청년들의 모습에 나는 뜨거워졌다. 눈은 빨개지고 손이 떨렸으나 그 시대 그곳에 실재하는 그들을 앞에 두고 함부로 무언가를 원망할 순 없었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27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해방 반년 전이었다.



이 영화는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앞서 고종사촌이자 절친인 송몽규를 주목하게 만든다.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윤동주 평전>을 보면 송몽규에 대해 다 나온다. 모든 인간은 혼자 세상을 살지 않는다. 송몽규를 빼고 윤동주를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송몽규를 모르는 것은 그 시인의 삶과 죽음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윤동주를 사랑한 자신을 사랑한 것이지, 윤동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윤동주의 껍데기를 사랑한 것이다

가감할 생각이 들지 않는 문장들이다. 동주의 주변에 대하여 덜 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고개를 내밀어 더 들여다 보는 것은 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역사를 재구성하고 창작할 때에 이런 사랑법을 가지면 좋다. 자세하고 확실한 고증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별이 뜨는 밤에 동주의 시를 읊자.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사랑하진 못하여도 사랑을 잃지 말자.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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