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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일 Sep 04. 2022

여름의 텃밭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어느덧 여름이 짙게 다가오고 더위가 꺾일 만큼의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니 미세먼지 없는 하늘엔 뭉게구름과 양떼구름이 가득했고 저 멀리 있는 산도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선선하다.

 오랜만에 네 식구가 모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고기 굽는 소리, 창문을 통해 들리는 바깥 기분 좋은 소음이 한데 어우러져 활기가 돋는다. 언제나 그렇듯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밥상에 앉았다. 삼겹살과 된장찌개, 찹쌀과 잡곡을 넣어 지은 밥, 오이소박이, 그리고 유독 싱싱해 보이는 상추와 쌈채소들.


"상추 싱싱하다."


 한마디 꺼내자마자 웃음꽃 피우면서 밭에서 직접 캐논 거라며 먹어보라는 부모님 얼굴엔 눈에 초승달이 펴있다. 상추, 씀바귀, 치커리, 당귀.. 쌈을 가득 메우고 삼겹살과 밥, 김치, 파절이를 넣고 한입 가득 욱여넣으니 내 눈도 보름달이 되었다가 씹을수록 초승달이 되어간다. 며칠 전까지 비가 많이 쏟아졌다. 서울도 만만치 않았는데 시골집은 어땠을까 싶어 물어보니 매일 장마가 쏟아졌다더라. 다행히 상추는 멀쩡했구나 생각하면서 오이소박이를 먹다가 아차,


"토마토는 어떻게 됐어??"  


 토마토는 비에 약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도 나온다. 노지로 키우는 만큼 토마토가 걱정됐는데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냉장고에서 빨간 토마토 두 개를 꺼내온다. 단단하고, 윤기 있다. 궂은비에도 견뎌줘서 고맙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주말만 되면 지방으로 내려가 밭을 갈았다. 매년 감자, 고구마, 양파, 상추, 마늘, 청양고추, 토마토 등등. 매일 본업을 하다가 주말만 되면 이 많은 채소들을 키워내는 게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어릴 땐 부모님이 매주 내려가는 게 찜찜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쉬는데 주말은 집에서 푹 쉬거나 영화라도 보지.라고 생각했었다. 허리 굽혀서 밭을 가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땡볕 아래에서 뭣하러 사서 고생하나 생각도 들기도 했다. 어릴 적 몇 번 따라간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직접 밭을 가꾸진 않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 혜원은 서울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집에서 봄동을 캐 된장국을 끓이고 감자를 심어 엄마가 해주던 감자 빵을 다르게 만들어보기도 한다.

친구들과 모여 직접 빚은 막걸리를 나눠먹기도 하고 다슬기를 줍고 이야기 꽃을 피운다. 혜원은 영화 초반에 '배가 고파서'내려왔다고 한다.

비가 쏟아져 토마토는 다 상하고 태풍 때문에 벼는 다 쓰러지기도 했지만 혜원은 다시 몸을 움직인다.

재하는 이런 말을 한다.


"그래도 농사가 체질에 맞아. 적어도 농사에는 사기, 잔머리. 이런 거 없잖아."


 조금 지쳐있었다. 몸이 축날정도로 힘들고 바쁘진 않은데, 사람을 계속 만나고, 말 한마디 마디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거나 앞에선 웃다가 뒤에선 욕을 하거나 윗사람에겐 아부의 연속. 어떤 행동 하나 하려고 해도 눈치를 봐야 되고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었다. 차도 한가운데 서서 빌딩 사이를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혔다. 그런 나에게 리틀 포레스트는 하나의 쉼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부모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매주 멀리까지 내려가서 밭을 가꾸는지.

어릴 때부터 가족이 다 모이면 밥 한 끼 대충 먹는 적이 없었다. 인스턴트 음식이 밥상에 올라온 적은 나나 형이 하도 떼써서 가끔 올라오는 햄 정도가 다였고 대부분이 조기구이, 감자볶음, 삶은 양배추, 오이고추, 계란찜, 잘 익은 배추김치, 물김치, 열무김치가 가득 올라왔다. 가끔 집 마당에서 구워 먹는 닭갈비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영화를 보고 나도 도망가고 싶었다. 아니,  답을 찾을 때까지 잠시 쉬고 싶었다. 사기, 잔머리 이런 거 없이 정직하게 직접 심어 재배하고, 그걸로 맛있게 요리하고 싶다. 엄마한테 요리도 배우고 밭을 갈다 같이 김치에 막걸리 한잔 나눠마시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은 알게 될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기분으로 밭을 가는지. 나 또한 다시 나아갈 힘을 얻고 활기차게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궂은비에도 단단히 견뎌준 토마토처럼 나도 더욱 단단해져서 웃을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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