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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Aug 13. 2022

전업주부 초년생은 바빠도 너무 바빠

미얀마에 오고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남편은 일을 바로 시작하고, 나는 1년 동안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다. 공부라 함은 언어 공부다. 미얀마어와 영어. 거기에 덧붙여 나는 내조의 여왕을 꿈꾸고 있다. 내 일을 찾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 가정을 안정시키고 미얀마에 정착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되는 포지션은 내조하는 아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내 본업은 언어 공부하는 전업주부다.


하지만 문제는 언어 공부는 익숙한 일이지만, 전업주부는 너무나 생소하다는 것이다.

친정엄마도 늘 일하는 엄마였기에 내 상상 속 전업주부는 꽃무늬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칙칙폭폭 밥을 지으며 ‘여보 오셨어요~’ 하는 드라마나 영화 속 이미지가 전부다.


처음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거면 다 아닌가? 너무 시간이 남아서 심심하겠는데...’라는 아주 오만방자한 생각을 했다. 1년 반 정도 미얀마에서 혼자 살면서 일도 집안일도 하면서 여행도 잘 다녔던 때를 생각하며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것과 둘이 사는 것은 스케일이 달랐고, 본업이 주부인 것은 대충 혼자 살만큼만 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요즘 내 일과는 이러하다.

6:30 am 기상

7:30~8:30 am 헬스

9:00~9:30 am 남편 아침 샐러드로 차려주기

9:30~10:00 am 씻고 아침 샐러드 먹기

10:00 am~12:00 pm 미얀마어 과외

12:00~13:00 pm 점심 먹고 집안일

13:00~15:00 pm 장보기

15:00~17:00 pm 장본 것 정리 및 재료 손질, 집안일

17:00~18:30 pm 저녁 준비

18:30~19:30 pm 저녁식사

19:30~20:30 pm 남편 점심 도시락 싸기, 아침 샐러드 손질

20:30~ 공부 및 할 일 하기, 남편이랑 시간 보내기


쉴 시간이 없다ㅠ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왜 밥을 하루에 세끼나 먹는지!?


운동을 하니 남편 출근 전에 아침 건강하게 잘 챙겨 먹이고 싶어서 샐러드를 만드는데, 이 것도 재료 손질이 한 시간은 넘게 걸린다. 물론 한 번 해두면 며칠은 꺼내기만 해도 되지만, 초보 전업주부는 동선과 조리가 매우 비효율적이라 계란 삶고 고구마 삶고 감자 삶고 브로콜리 데치고 양상추, 상추 씻고, 닭가슴살 삶는 것 등이 너무나 오래 걸린다...

심지어 어떻게 삶아야 하는지도 인터넷 찾아봐야 하는 아주 깜찍한 경우가 자주 발생하니 이것 참 나지만 내가 답답하다.

아침 샐러드

그리고 나는 내조의 여왕을 꿈꾸는 전업주부이기에 남편 점심도 도시락을 싸서 보낸다. 처음엔 진짜 뭘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샐러드에 넣는 것들을 싸서 보냈다. 그래도 먹을 때 깔끔하게 먹을 수 있도록 키친타월 깔고 물 나오는 파프리카나 닭가슴살, 오이 같은 것들은 쿠킹호일에 싸고, 토마토 꼭지 따서 넣고, 견과류도 아몬드만 먹으면 질릴까 봐 호두도 같이 싸서 넣고 그랬다. 내용물이 별거 없으면 정성이라도 듬뿍..! 들어가 보이도록!


그러다가 감자 계란 샐러드를 호밀빵에 넣어 만든 샌드위치면 먹기도 편하고 상할 염려도 없고 나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전을 했다. 물론, 맛은 있었다. 그냥 재료를 다 삶아서 간 맞추고 으깨 넣으면 되는데 맛이 없을 리가.

그러나 감자와 계란을 삶는 것이 이렇게 고된 일인 줄 몰랐다. 그걸 다 껍질 까고 으깨고... 거기에 식감을 더하려고 오이도 다졌는데, 그거 물기 뺀다고 키친타올 절반은 쓴 것 같다. 그래도 점심에 샌드위치 먹고 와서 무척 맛있었다고 고맙다고 해주는 남편의 귀염진 얼굴에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하, 이 것이 주부의 마음인가... 하지만 그 이후로 이틀 동안 같은 메뉴로 도시락을 싸줬다...ㅎ

감자계란오이샌드위치

지쳤지만, 아직 두 끼밖에 해결을 못했다는 것이 문제다.

대망의 저녁식사가 아직 남아있다! 미얀마에 오고 저녁을 나가서 먹는 일이 많았지만 이제는 내가 좀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뭘 해 먹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사 후 이제 필요한 양념이나 주방용품들을 사고 있는 때라 아직 채우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이거 할까! 싶으면 저게 없고, 저거 할까! 싶으면 이게 없는 그런 상황이 계속 생기니 자꾸 푸슉- 김이 빠졌다.


평소에 요리를 해보질 않아서 재료들을 보고도 뭘 하면 맛있겠다라던가, 이것만 있으면 이 요리를 할 수 있겠다며 뭔가를 계획적으로 사 오고 요리를 한다는 것이 참말로 어려웠다. 그래서 매일 틈만 나면 인스타에서 요리 계정 찾아서 보고 저장해 두고 하지만 아무튼 이게 이론적으론 어렵지 않은데 현실은 너무 어렵다.


하, 이런 식이면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사 먹자...ㅠ’ 할 것 같아서 다이어리와 펜을 꺼내 들고 냉장고 앞에 앉았다. 뭐가 있는지 그림을 그려 리스트업을 했다. 그리고 이 재료들로 뭐를 만들 수 있을지 열심히 검색하고 주위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밀푀유 나베, 새송이 구이, 토마토 파스타, 당면 계란 만두, 두부칩과 미트토마토소스를 만들었다!

너무너무너무 뿌듯하고, 남편이 맛있다고 호들갑 떨며 먹어주면 그렇게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정말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아직 뭐 하나 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우당탕탕 요란스러워서 남편이 ‘다치지 않게 조심해!’를 열 번 정도 외치게 만들지만, 그래도 하나씩 도전하며 성공하는 내 스스로가 주부로서 한 뼘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이 외에도 전업주부 초년생은 너무나 바쁘다.

청소도 왜 이렇게 해도 해도 계속할 게 있는지... 그냥 흐린 눈 하며 대충 살고 있지만, 그래도 청소할게 계속 나온다... 빨래도 수건과 일반 옷만 나눠 빠는데도 계속 돌리고 널고 개야 하고, 정리할 것은 하면 할수록 더 생기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근데 왜 티가 안 나지... 그게 더 슬픈 그런 상황. 집안일은 티 안 나게 계속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장을 보러 가는 것도 몇 시간씩 걸린다. 물론 근처에 마트가 없어서 차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고, 이 마트에는 이 것이 있지만 저것은 없어 다른 마트에 가야 하는 그런 어려움이 있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도 맞다. 미얀마는 한국처럼 좋은 물건을 빠르게 배송받아 사기가 어려워서 무엇이든 직접 발로 뛰며 가보고 살펴보고 사야 한다.


이게 신선한 건지 아닌 건지, 향이 원래 이런 건지 아닌 건지, 과연 내가 이걸 손질할 수 있을지, 가격은 적당한 건지 싼 건지 비싼 건지, 비싸다면 왜 비싼 건지, 무슨 재료가 더 필요할지, 무슨 소스가 필요한 건지, 우리 입맛에 잘 맞는 것은 무엇일지, 이 태국어는 뭐라고 쓰여있는 건지, 무슨 맛인 건지,... 물건을 하나 사려고 해도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아침에 근력 운동하다가 시간이 다 가면 유산소를 못할 때가 많은데, 장 보러 가서 유산소 다 하는 기분이다. 다리 아프고 배고프고 기운 빠지는 그런 장보기 시간.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야 하는 상황이라 장도 거의 매일 보러 간다. 에어 프라이기를 사야 할지 오븐을 사야 할지, 배게는 뭐를 사야 남편이 편해할지, 내 취향과 함께 남편 취향까지 살펴야 하니 여간 고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냥 종업원이 말하는 대로 돈을 내고 잔돈과 영수증 받아서 지갑에 쑤셔 넣고 집에 와서 가계부를 쓰려고 보니 파프리카를 1개 샀는데 6개가 찍혀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아보카도를 5개 산 줄 알고 5개 값을 지불했는데 4개만 있었던 적도 있었고, 잘못 보고 샐러드 소스를 원래 먹던 것이 아닌 것을 사온적도 있었다. 소고기 값이 원래 이 정도 가격인지 모르겠어서 얼떨결에 샀지만 찝찝하기도 했다.


멋진 주부 9단이 되기까지 배움의 시간이 꽤 길어질 것 같다.


그래도 응원해주고 좋아해 주는 남편이 있어 참 행복하고, 더디지만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내가 기특하고, 함께 고민해주고 도와주는 이웃이 있어 감사하다!


요즘 퇴근한 남편이 사부작대는 내게 ‘뭐 할까?’ 물어보면 ‘가만히 쉬어줘! 내가 필요하면 부를게!’ 한다. 남편이 끼면 남편이 거의 다 해버릴 것 같아서 내 실력 향상에 방해가 된다. (남편은 요리를 잘한다.) 한국에서 요리할 일이 있으면 남편 주도 하에 장보고 요리를 했어서 나는 는 게 하나도 없다.ㅠㅜ


최소한 1년 동안은 내가 집에 있기로 했으니, 열심히 언어 공부하고 집안일 마스터해서 내조의 여왕, 주부 9단 까진 아니어도 주부 4단까진 되도록 열심히 해봐야겠다.


얍!!

밀푀유 나베
당면계란만두
두부칩+토마토미트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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