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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홍민 Jan 28. 2024

미니멀라이프가 안됐던 이유

흙수저 왕따 어린이의 상처


 2019년, 수많은 물건들을 정리하며 한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긁어모으고, 물건을 모으는것에 집착하는걸까? 하고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맥시멀리스트인 부분이 있어서, 미니멀라이프가 어려운 삶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저는 그게 좀 유난하고 심한것 같은데 왜 이렇게까지 물건에 집착하는걸까? 스스로도 알고 싶었었어요. 저에게는 대충 그냥! 이런게 없는 편입니다. 왜 이러는걸까, 항상 본질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래전 기억까지 샅샅히 검색해봅니다. 그러다가 한가지 딱 걸려서 수면위로 올라오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어느정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을 보니 선연히 저에게 자리잡은 기억인 모양입니다. 저는 어릴때 집이 아주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쉽게 말하는 흙수저, 그런 집안이었어요. 요새는 개 부자들도 자기 어려웠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라고... 빅토리아 베컴이 80년대에  롤스로이스 타고다녔는데 부모님이 노동자 계급이라고 하더라고요? 미쳤나봐요. 별걸 다 흉내내! 지랄 염병이야! 가난을 훔쳐서 좋냐? 지금부터 과장은 하지 않고 그냥 팩트만 설명하려고 합니다. 


 어릴때 설마 제가 게으르고 일을 안해서 가난했던것은 아닐거고, 부모님 이야기를 먼저 하는게 좋겠죠? 시골출신의 저학력  블루칼라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는 결혼해서 지방 소도시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서울로 이사를 가셨어요. 서울에 일자리가 더 많다고 해서 그랬던것 같습니다. 서울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가 않죠. 부모님은 힘들고 돈때문에 매일 싸우고 집은 춥습니다. 그래서 다시 지방 소도시로 내려오셨어요. 저는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이 납니다. 80년대 서울살이할때의 기억.. 90년대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의 기억들이 다 남아있어요. 90년대에 지방으로 내려와서 살았던 첫 집은 단칸방이었고, 그 이후에 이사를 가서 주택에 살았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오래된 집에 살았는데 37년이 된 집이라고 했던것 같아요. 어릴적 기억을 해보면 항상 단칸방이거나, 아주 오래된 주택이거나, 방이 두개 있거나 그랬던것 같아요. 이사도 징그럽게 많이 다녔어요. 1-2년 주기로 이사를 다녔던게 기억납니다. 반지하에서 무너지는 주택으로 거기서 단칸방으로...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모님 두분이 모은 전 재산을 투자한 돈을 사기를 당하셨었습니다. 그걸로 또 너무 많이 싸우셔서 저는 그 사기꾼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아저씨 이름을 말하면서 엄청 싸우셨거든요. 








 헉! 생각해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가난했던것 같아요. 이정도면 그냥 뭐 똥 수저 아닌가 싶은게.... 남의 집에 얹혀산적도 당연히 있구요. 막내 고모네 집에 꽤 오래 얹혀살았던게 기억이 나네요. 처음에 빌라로 이사갈때 조금 감동했습니다. 나름 신식이었어요. 지은지 6년밖에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 빌라에도 쥐가 뛰어다니고 바퀴벌레가 수백마리 있었지만 그래도 37년된 주택이나 반지하보다는 훨씬 따뜻했어요. 기관지가 약하고 알러지가 많은 저는 항상 아팠습니다. 기관지가 약하고 알러지가 많으니 주거 환경이 좋지 않으니까 아팠던건데, 저는 그냥 병약한줄 알았어요. 어른이 되고, 주거환경을 스스로 개선해내자 더이상 아프지 않았어요.  어른돼서 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튼튼하더라고요? 이나이 먹었는데 지병 하나가 없네. 



 어린 저는 항상 가난했고, 배고팠고, 그래서 급식같은걸 보면 허겁지겁 먹었고, 많이 먹었고, 씻지못해 냄새가 났고, 가난했고, 친구가 버린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뭐 그런애가 성격이 좋을리는 없고,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우는 애는 세상에 단하나, 캔디뿐인데 그마저 만화속인물이니까, 성격이 나쁘고 시니컬하기까지 하니 자연스럽게 왕따였죠? 외롭고 슬펐던 저는 하루종일 도서관에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도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고,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싶었고 슬픈마음때문에 일기를 썼는데 아이들은 제 책상을 마구 뒤져서 그 일기를 읽고 비웃고 놀렸습니다. 애들은 저를 싫어했고 특별히 제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한적한 곳으로 저를 불러서 저를 밀치고 으름장을 놓고 그랬습니다. 



엄마는 아파트에 사는 엄마 친구에게 옷과 가방을 얻어다가 저를 줬습니다. 엄마 친구분이니까 그 딸은 또 제 동급생 친구였겠죠? 제 책가방에는 친구 이름이 적혀있었어요. 아파트에 사는 세련된 그 친구는 제 가방을 보더니 어머 저거 내건데 내가 버렸는데, 윤홍민이 매고다녀... 너 이거 쓰레기장에서 주웠어? 라고 말했어요. 자존감이라는게 산산조각 나는 일이었죠. 신분이란 그런걸까요? 민주주의 사회에 신분이 없다는 것은 거짓부렁입니다. 돈이 신분의 상징이 됩니다. 현대 한국에 카스트 제도가 있었다면 저는 볼것없이 불가촉천민이었을거예요. 그래서 아마도 다들 그렇게 없어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거겠죠. 






 혹시 그거 아세요? 오래된 빌라에 라면을 방바닥에 두면 빨간색이 되는데, 불개미가 모여들기 때문이예요. 우리가족도 먹고 살기 힘들었는데 어떻게들 불개미가 귀신같이 알고 달려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배고팠고, 부모님도 배고팠고, 언감생심 반려동물은 꿈도 못꿨습니다. 개가 먹을음식이 없는거예요. 중학생때, 사랑이 고파서 엄마 몰래 작은 햄스터를 데리고 왔습니다. 햄스터는 삼천원이니까요. 그리고 쓰레기통을 깨끗히 씻어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햄스터 이름은 궁금이었어요.  저는 궁금이를 열심히 돌봤지만 금방 죽었습니다. 일년을 못살았던것 같아요. 너무 오래전이라 인터넷같은게 없던 시절이라서 햄스터 사료를 사줄 돈이 없어서 쌀알을 주고 물로 씻기면 안되는데 잘해준다고 목욕을 시키고 그랬습니다.어리석었어요. 베딩을 깔아줘야하는데 그걸 몰랐어요. 아주 작은 생명이어도 모든 생명이 하는 기본적인 행위는 다 하기 때문에 적절한 관리가 필요했는데, 제가 가진건 사랑뿐이었고 그런 사랑은 때로 어느 죽음에 대한 변명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합니다. 궁금이가 죽던날 몇시간이고 울었어요. 








 다행히 엄마아빠는 열심히 일하셨고, 사정은 점점 나아졌고, 저도 돈을 벌게된 순간부터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뭐 지금으로서는 저도, 부모님도 돈 때문에 아쉬워서 남을 크게 부러워할 만한 경제 사정은 아닙니다. 

 그때 그 가난에 대한 숨막히는 두려움이 저희의 원동력이 되어서 부모님과 저는 돈을 허투로 쓰지 않고 열심히 모으고 저축하고 불리면서 살았어요.  

 하지만 상처라는것은 본디 완전히 회복되는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어릴때 상처가 나면, 그 상처는 깊이가 옅어질 지언정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자라나면서 크기 자체는 더 커집니다. 깊고 좁은 한때의 큰 상처가 인생 전반을 지배하는 흔적으로, 훨씬 넓고 얉은 상처로 변한것일뿐이죠. 저는 아직도 가끔 제가 그 더럽고 냄새나고 차가운 방에서 밤새기침을 하며 책읽는, 하루종일 코를 풀어 아이들이 싫어하는 더럽고 작은 가난한 왕따 아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요. 그게 저에게 남은 넓고 얕은 저를 지배하는 흔적으로서의 상처겠지요. 






 저는 현재 뷰티패션업계에 종사하는 강사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름다운것을 사랑해 그것을 사랑으로 가르치며 사람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는데, 그게 제 정체성인만큼,  아름다운것을 어릴때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항상 고통스러웠습니다. 흙수저 왕따 어린이가 어떻게 사랑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할수 있을까요? 그래도 어떻게든 아름다움을 사랑했습니다. 티비를 볼땐 꼭 화려하게 치장한 가수가 나오는 음악프로그램을 봤고, 배우들한테는 관심이 없었어요. 가수들만큼 화려하지가 않잖아요. (그나마 집이 가난해서 케이블 티비도 안나와서 자주 보지도 못했습니다) 패션잡지를 돈을 모으고 모아서 한권을 사서 여러번씩 봤고, 도서관에 아주 자주가서 다양한 미술, 향수관련 책도 읽고 아름다운 표현이 많은 문학작품들을 몇번이고 계속 읽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추구했어요. 그래서 제 전공은 재밌게도 디자인반 국문과 반, 학사가 두갭니다. ㅎㅎ 



 어린 저 자신이 아름다웠던적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과체중에 시달렸습니다. 시간가난 또는 실질적 가난이 비만을 부르는것은 이제 상식이죠? 시간이 없거나 돈이 없으면 건강한 음식을 여유롭게 천천히 먹기 어려우니까요. 매일 아침 일어나면 부모님은 이미 안계셨고 스팸과 3분카레와 냉동식품들이 주식이었습니다. 밥통안에는 늘 바쁜 엄마가, 언제 했는지도 모를 너무 오래 가열해서 습기가 날아간 버석한 밥이 잔뜩 들어있었고 저는 그 밥을 잔뜩 퍼서 먹었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졌고, 하루하루 우울하고 슬펐어요. 감성이 예민하고 외모에 예민했던 사춘기시절은 더욱이나 우울했어요. 






 다행히 중학생쯤이 되면서 그 사기친 아저씨는 어찌어찌 법의 철퇴를 맞아 돈을 갚았고, 부모님은 가게를 시작하셨고, 몇년간 노력하신 결과로, 고등학생을 졸업할때쯤 되어서 저희집 사정은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그때부터 고등학생때부터 몰래몰래 매니큐어와 섀도들을 사모으기 시작했어요. 그것들이 너무 예뻤거든요.왕따 찐따여서 그것들은 써본적은 없습니다. 그냥 모았어요. 그게 너무 예뻤거든요. 그리고 컬러렌즈들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학생이니까, 눈동자 컬러라도 바꾸고 싶었었어요.그런식으로 무언가'아름다움'에 관련된 것들을 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또 뭐랄까, 굉장히 시니컬하고 유니크하고 책을 많이 읽는 어린이를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조금 머리가 크고 나서는 또 그런애들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고등학생때부터는 특별히 교우관계가 나쁘지도 않았는데 너무 개성이 강했던지라,, 친구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호불호가 강한 타입이었어요. 그래도 더이상 저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없었어요. 모든게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졸업하고 대학생이 될 때 쯤에는 본격적으로 치장을 시작했는데 그당시 마침 또 미샤나 더 페이스샵 같은 초저가 화장품 브랜드들이 출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당시는 로드샵 제품들이 왠만해서는 전제품이 균일가 3300원이었어요. 그래서 미친듯이 화장품을 사모으기 시작합니다. 반짝이는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해요. 당시에는 살도 꽤 빠지고 집도 상황이 좋고 해서 원없이 꾸미고 발랐는데 사실 그렇게 화장품을 많이 사면 아무리 많이 바르고 꾸며도 다 쓸수도 없어요...... 좋은거 한두개만 샀으면 차라리 좋았을텐데, 싼것을 스무개씩 사니 때깔이 특별히 좋진 않았습니다. 



 항상 물건이 너무 많아서 친구들한테도 엄청 나눠주고 덕분에 산타라는 별명이 생겼었어요....... 그 이후에는 화장품 구매를 멈추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뷰티업계로 들어왔고, 그러면서 서울로 다시 이사를 왔습니다.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또 하나 문제가 생깁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 도시에서 너무나 외롭고 무서웠습니다. 내가 혼자살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서 갑자기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어릴때의 결핍과 외로움이 더해지니 자연스럽게 뭐 하나라도 떨어지는걸 못견디겠고 물건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빈칸이 생기면 채우기 시작합니다. 혼자 원룸에 사는 사람에게 늘 지나치게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자취방의 작은 냉장고 안이 잘 비지도 않았고요. 그래도 재밌는건 돈은 참 열심히 모았습니다. 연봉이 1600만원이던 시절이었는데 그시절에 1년에 천만원씩 모았습니다. 이게 무슨말이냐면, 정말 어디서 귀신같이 싸구려 잡스러운 물건만 골라서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면서 공간을 채웠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새로 생기기 시작한 천냥샵, 다이소 이런데를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물건들을 샀습니다. 지금의 제가 그때의 저를 본다면 홍민아, 너는 너무 귀한 사람이라서 이런 싸구려 물건은 잘 안어울려. 너만큼 귀한 사람에게는 더 좋은 물건이 어울린다. 라고 말해줬을것 같아요.  







 또 혼자라는 외로움과 심심함에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여러분들이 보시는 이 블로그도 직장인 초기에 시작한 블로그입니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규모가 커지면 체험단 의뢰가 정말많이옵니다. 이런 물건을 줄테니 리뷰를 써달라고 연락이 와요. 또 수많은 화장품, 물건,, 물건,,,, 이제는 사지 않아도 물건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좋았습니다. 공짜인것도 좋았고 예쁜것도 좋았고 물건이 늘어나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이후로는 아시다시피, 그런 채로 결혼을하고, 아이를 낳고, 살았죠. 한번씩 미니멀라이프가 유행할때, 미니멀라이프 관련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될때마다 물건을 정리해서 치우거나 주변에 나누어주긴 했지만 물건은 또 늘어나고 또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물건들의 요요현상이 지겨워서 진짜로 다 치워버리겠다고 마음 먹은것이 2019년이구요. 그이후로 달려서 여기까지 왔네요. 




 20대의 저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학벌에, 외모와 몸무게에, 아름다운것을 그렇게나 좋아하면서도 저는 정작 그리 세련되지 않은 모습에, 낮은 연봉에  항상 열등감이 있었고, 항상 좋은것은 내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대접받는것이 어색했습니다. 30대 때에도 중반까지는 그랬던것같아요. 40대인 지금은 별로 상관 없어졌습니다. 신기하게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한 이후로 모든게 다 술술 풀렸습니다. 아마 쓸데없이 분산되던 에너지들이 모이면서 그렇게 된게 아닐까 생각해봐요. 



 꿈만꾸던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외모나 몸무게는 사실 바꾸기가 생각보다 쉽습니다. 돈은 벌면 되니까 계속 이직하면서 연봉을 올렸고, 필요한만큼 벌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기본적으로 큰돈이 필요한 인간 유형이 아니긴 합니다. 돈을 많이 쓰지는 않아요. 



 컴플렉스가 해결되고 나니 대접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았고 대접을 해주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촌스러워보여서 / 뚱뚱해서 / 돈이 없어보여서 이렇게 나한테 함부로 하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누가 저에게 함부로 해도 별로 아무렇지가 않아요. 이사람은 기본 매너가 참 없는 사람이네. 크게 잘되긴 어렵겠다. 자신의 한번뿐인 삶을 위해서라도 사회생활에서 꼭 필요한 매너는 습득하는게 좋을텐데. 뭐 알아서 하겠지. 니인생인데~ 화이팅! 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제 더이상 원인을 저의 컴플렉스에서 찾지 않고 상대방의 문제로 보게 되었어요.  




 또 그 어린시절은 저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지금은 별로 아무렇지 않게 됐습니다.  가난하다고 저를 무시하고 놀리고 왕따시켰던, 못돼먹은 애들중에 지금의 저보다 더 잘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거라는 확신이 있거든요. 그 못된 마음을 고치지 않고 자라났다면 뭐 크게 별볼일 있는 어른으로 자라났을거 같지는 않아요. 아마 제가 제일 멀쩡하게 괜찮게 잘 살고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어느 누가 개심해서 지금은 멀쩡한 어른으로 살고있다 한들  저는 누구보다 멋진 인간일 자신이 있어요. 



천 이백만 힛 인증,, ㅎㅎㅎ 

정말 갑자기 잘난척이긴 하지만 걔네들중 단 한명도 천이백만뷰가 넘는 블로거도 없을거고 국가자격증 열개 있는 놈도 없을거고 둘다인 놈은 더 없을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기묘한 자부심이지만 오히려 너무 잘살았단 생각이 들어요. 흙수저 왕따 과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 내가 제일 멀쩡하게 그린듯이, 잘먹고 잘살고 있는데. 내가 뭐하나 빠지는게 있냐? 없는게 뭐야? 궁극의 회복탄력성. 존멋탱. 살아있는 전설,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다 간디도 울고 간다 ㅋ 내가 짱이다 모드가 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https://blog.naver.com/iloveyou911



 그리고 그런 과거를 겪은덕에,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굉장히 많았지만 장점도 있어요. 너무 안겪어도 될 많은 일들을 겪어보면서 인생사 희노애락을 압축해서 겪은 덕분에 사람들을 더 폭넓게 이해할수 있게 됐고, 태도가 좋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사람을 봐도 어느정도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에게도 어떤 일이 있었겠지, 너에게도 어떤 결핍 또는 어떤 과잉이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좀 나은데 이게 진짜로 그렇더라고요. 눈에 띌정도로 공격적이거나, 못난 행동을 하거나, 질투가 많거나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성격 이상한 인간'들, 심리적인 문제를 품고있는 인간들은 보통 어떤 결핍 또는 과잉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이해는 하지만 딱히 품어주진 않아요. 왜냐고요? 걔네 엄마아빠도 해결 못해서 걔 성격이 그런거를 제가 어떻게 품어서 계도시켜요. 지들이 알아서 해야지.... 저는 설리번선생도 아니고 평강공주도 아님. 인생은 셀프다 이거예요. 



 무튼, 저는 고등학생때 이후로 괜찮아졌지만, 아직도 그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때의 그 무기력한 어린이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물건에 둘러쌓였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증명하고 싶어할수록 증명할수가 없다. 모든것을 가진 사람, 정말 괜찮은 사람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물건으로 증명할수 있는 삶은 없다. 그리고 더욱 더 홀가분해졌습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어요. 인생이라는 게임속에서 저는 죽을때까지 쪼렙 뉴비일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게임 속에서 하나의 치트키를 얻게 되었어요. 뭐냐구요? 미니멀라이프요. 원하는 모든것을 가지고 싶다면, 그것을 갖기위해서 더 애쓰지 마시고 우선 필요없는것들을 제거해보세요. 삶이 선명해집니다. 내가 갈길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해요. 그럼 그 길을 그대로 걸어나가시면 됩니다. 앞만보시구요. 내 과거조차 바꿀수 있습니다. 지금이 좋으면 과거도 전부 다 표백이 됩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너 왕따 거지새끼였던거 내가 다 아는데 잘난척 마라 그러면 저는 아 그래? 그래서 더 진짜 대단한거 아니야? 크  역시 나는 존멋탱 마하트마, 위대한영혼 이럴겁니다. 


 결과가 좋으면 모든게 좋은법이죠, 얼룩진 과거를 표백하기 위해서는 미니멀라이프를 처방합니다. 제가 그렇게 얼룩을 지워냈고, 앞으로도 그럴거예요. 



 조만간 무슨수로 살을 빼고, 돈을 모으고, 벌고, 흙수저를 탈출했는지, 무슨수로 십수년간 원하기만 하고 발걸음도 해보지 못했던 대학원에 가서 컴플렉스들을 해결했는지에 대해서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미니멀 팁


과거의 영광은 현재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과거의 얼룩 또한 지금의 나를 망칠수 없기 마련입니다. 한때의 영광을 되새기게 해주는 물건들이건 한때의 고통을 되새기게 해주는 물건이건 정리해보세요. 영광을 정리하면 현재의 내가 보이고 고통을 정리하면 미래로 나갈 힘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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