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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Oct 17. 2020

흔한 사랑이야기 - 4




내게는 한 사람을 열렬히 사랑했던 기억이 있다.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갖는 경험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어떤 이는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강렬한 사랑의 경험 인지도 모른다. ‘목숨을 내놓아도 좋을 만큼’이라고 감히 생각했었으니까.


그는 그냥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저 스쳐갈지 모르는, 지인으로 남을지 모르는. 우리에게 특별한 운명적 사건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냥 그렇게 그가 좋았다. 내게 사랑은 보통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평범하게 찾아왔다.


 잔잔한 목소리가 좋았고 사람들 틈에 반응하는 다정한 말투가 좋았고 안 보는 척 안 듣는 척 모두 보고 듣고 기억해서 나를 챙겨주는 것도 좋았고 이상하게도 별다를 것 없는 그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좋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작은 행동 속에서 본능적으로 그의 순수한 영혼이 느껴졌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어느새 그를 바라보는 내 가슴이 두근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특별하다, 특이하다라고 할 만큼 순수한 면이 많았다.


 술도 마실 줄 몰랐고 담배 역시 피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또 어찌나 좋아하는지 모든 술자리를 다 따라다니면서 사람들 속에 섞여있곤 했다. 술 한 모금 먹지 않은 채로 새벽까지 사람들 틈에 그렇게 껴 있다가 오지랖이란 오지랖은 다 부려가며 술 취한 사람들 모두를 집에까지 챙겨 보냈다. 물론 그렇게 챙김을 받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나였기도 했고.


 우리는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늘 모임이 끝나면 내 차를 타거나 오빠 차를 타고 함께 왔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오빠는 모임에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둘 다 차를 가지고 오는 날이면 같은 차를 타고 집에 갈 수 없었으니까 그런 핑계로 내 차를 타고 같이 가고 싶었던 거다. 보통 그런 꼼수를 부리면 어디서 허튼수작이냐며 불쾌감이 느껴지는데 오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하면 내게 자기 마음을 들키지 않고 같이 있을 수 있을까 고백도 못하고 고작 그런 수를 꾀어낸 순수한 소년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고백도 못하고 쭈뼛댄 시간이 얼마였는지. 나 혼자 술에 잔뜩 취해 왜 좋아하면서 고백하지 않느냐고 투정 부리듯 졸라대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귈 수나 있었을까.


 함께 산책을 할 때면 오빠는 들 풀 이름들을 줄줄 꾀었다. 부모님이 바빠 어린 시절을 할머니 밑에서 자라서 그렇다고 했다. 내가 엄마랑 산책을 할 때 들꽃을 보고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하면 백과사전처럼 엄마는 들꽃의 이름을 줄줄 알려주곤 했는데 아마도 오빠의 할머니가 꼬맹이 오빠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었었나 보다. 난 하나도 기억 못 하고 다 까먹어버렸는데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억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인지 오빠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 얘기를 할 때면 아이처럼 좋아했던 오빠의 모습이 참 좋았다. 아, 따뜻한 사람이구나, 이 사람의 기억 속 그 어린 소년을 더 알고 싶다, 그랬다.


목련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산책길을 걸어갈 때였다. 오빠가 성큼성큼 목련나무 밑으로 가더니 그중에 가장 넓은 목련 꽃잎을 하나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이파리에 바람을 후 불어 목련 꽃 풍선을 만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게 뭐냐며 폴짝폴짝 달려갔다. 신기하기도 하고 벚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목련을 들고 서있는 오빠가 사랑스럽기도 해서. 꼭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 같았다. 지금 그를 떠올리면 왜인지 몰라도 이 날의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남는다. 아마도.. 내가 사랑했던 그의 모습과 가장 닮은 모습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를 한 단어로 내게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순수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순수했다.  

들꽃을 꺾어 내게 들꽃 다발을 만들어주고 목련 풍선을 불어주고, 꽃잎으로 책갈피를 만들어주고 손편지를 써주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담아 오르골을 선물하고.

 그와 만나면서 이렇다 할 비싼 선물은 받아본 적이 없다. 남들이 기념일이면 다 한다는 비싼 레스토랑 데이트조차도 몇 년 동안 몇 번 가본 적이 없었다. 우린 늘 허름한 고깃집, 광장시장, 인사동 골목길, 종로 포장마차에서 데이트를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껏 다른 이들에게 받아본 그 어떤 선물보다도 그가 준 작은 선물들이 내겐 행복이었고 가장 큰 사랑이었고 ‘선물’이었다. 그 어떤 레스토랑보다도 인사동 별가루 박힌 하늘과 돌길이, 종로 포장마차의 오뎅국물에서 뿜어져 나온 허연 김이, 환풍기도 없어서 켈록거리며 고기를 굽던 고깃집이 내겐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다.


오빠가 내게 줬던 네 잎 클로버를 여즉 핸드폰 케이스에 끼우고 다니다가 얼마 전에 산책로 근처에 있는 탄천에 띄워 보냈다. 이렇게 해야 온전히 그를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제는 그립지도 않을 만큼 담담했고 그저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일 뿐이었는데 막상 마지막 남은 흔적을 떠나보내려니 마음이 아렸다. 그를 아직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때 너무 아름다웠던 우리들이 떠올라서. 그 기억을 떠나보내는 것 같아서.


요즘 문득문득 그때의 오빠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를 보면 너무나 닮은 모습에 오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순수한 웃는 모습을 보면, 때 묻지 않은 말투를 보면 자연스럽게 오빠가 떠오른다. 그리고 서지원이 부른 어떤 노래의 가사도 같이. 그를 정말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너를 닮아서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는.


글쎄. 내가 누군가를 또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면 오빠를 닮아서 사랑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 그 자체를 좋아해서 사랑하게 됐으면 한다.

아마도 지금 내 감정이 그러한지도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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