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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소포타미아 Feb 14. 2024

출신 대학교가 부끄러워서 수석졸업을 했다

내 인생을 바꾼 사건


"교수님, 저는 대학생 때 어땠어요?"


이제는 동네 술친구가 되어버린 나의 지도 교수님.

힘든 일, 곤란한 일이 생기면 부모님보다 먼저 전화를 걸곤 한다.


"너는 완전 싸가지 없는 애였지. 지 혼자만 머리 좋은 줄 알고 맨날 수업시간에 게임하고 그것도 강의실 맨 앞 줄에 앉아서."


"저 머리 나빠요. 그냥 그래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


"그때는 제가 간절해 보이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 자격지심, 이제는 많이 없어졌냐?"







그 물음에 대답은 못 하고 짠이나 하자고 했다.













1. 사건의 발단



입학통지서가 날아온 날, 그냥 이렇게 대학교에 들어가는 거구나 싶었다.

첫 등교 날까지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과목은 열심히 했으나 다른 과목과의 성적 편차가 심해 평균적으로 좋은 성적은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꿈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노력하지 않았고, 좋은 학교를 들어가야 하는 자발적 이유도 찾지 못했다.


1학년 첫 학기, 학과동 벽보 여기저기 붙어있는 여러 동아리 홍보지를 보던 중 전공동아리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술도 별로 안 좋아했고 다른 취미에는 관심이 없었어서 전공동아리에 들어가면 공부 잘하는 선배들에게 시험 족보도 얻고 왠지 도움이 될 것 같아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시험 기간이 되어서 3학년인 전공동아리 선배 중 한 명에게 과외를 받았는데

나보고 우리 학교에 들어오니 어떠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짤막하게


"그냥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어요." 라고 했다.


그리고 선배의 다음 말이 나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내가 만약 너라면 이러고 안 있어. 나라면 빨리 편입 시험 준비하거나 차라리 수능 한 번 더 본다. 우리 학교 나오면 사회에서 아무것도 못 돼."


그 선배 말은 우리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사회 낙오자, 루저가 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처음으로,

'네가 들어간 학교를 부끄러워해라.' 라고 한 것 같았다.








2. 나의 행동



그 선배의 말은 참 효과적이었다.

왜냐면 나는 그때부터 우리 학교가 진짜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지하철 역을 내리는 게 민망했고, 누군가 나에게 어느 학교를 다니냐고 물어볼까 봐 조마조마했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내 인생과 미래가 벌써 결정된 것 같아 무서웠다.


첫 중간고사가 끝나고 동기들은 정말 하나둘씩 편입과 반수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아직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심지어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정하지 못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점점 우리 학교를 떠나갔다.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땐, 보이지 않는 동기들이 많았다.


자격지심은 이미 커질 대로 커졌지만, 여기를 떠나 다른 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건 자신이 없었다.

왜냐면 그런 기회는 내가 이미 고등학교 때 날려버렸다고 생각을 했어서.

내가 못 했던 걸 다시 잘할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새로운 걸 잘하고 말지.


'여기서 성공하면, 다른 데서도 성공하지 않을까.'


그래서 편입, 반수 공부를 하라고 했던 선배의 말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

여전히 우리 학교는 나에게 부끄러운 존재였지만,


누군가가 내 미래는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 주는 게 싫어서.

그리고 그런 다른 사람의 말대로 사는 건 더더욱 싫어서.



이게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내 인생을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계기이다.







3.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4학년 졸업까지 내 등록금 고지서는 매 학기 '0원'이 찍힐 정도로 죽어라 공부했다.

거기에 그땐 술을 전혀 입에 대지도 않던 시절이라 동기들과 같이 논적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때 친구들이랑 그 흔하디 흔한 가평, 양평 펜션에 놀러 간 추억이 없다.


꼴에 애쓰는 모습은 또 보여주기 싫어서 수업 시간에는 노는 척 쌩쑈를 했다.


항상 도서관 아니면 카페, 독서실이었고

학기 중에도 영어 점수 올리겠다고 종로 YBM 토익 학원을 밤 11시까지 다녔다.

나는 공대를 다녔어서 사실 높은 영어 점수가 정말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 마저도 학과에서 제일 잘하고 싶었다.

덕분에 영어 관련 교양 과목은 정말 쉬러 가는 수업이 되어버렸다.


내가 가입한 전공동아리에서는 졸업까지 활동하며 3학년 때 팀장이 되었다. 

종강 때도 교내외 경진대회 작품 출품을 위해 매일 학교에서 살았다. 

동아리 방에서 먹고 자고 집에도 안 가고 철야를 하며 작품 제작을 했다.

그때 썼던 라꾸라꾸 침대가 가끔 그립다.




4학년 2학기 12월, 서울에 있는 외국계 대기업에 최종 합격했고,

졸업 학점 4.35를 찍으며 수석으로 졸업했다.


첫 취업 이후 나는 20대에만 4번의 이직이라는 자칭 '이직의 신'이 되었고,

해외 여기저기를 돌다가 지금은 두 번째 해외취업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모교에서 해외취업 강연 요청을 받아 한국에 잠깐 들어갔을 때 재학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학과장님은 내가 학교의 자랑이라고 하셨다.



나는 우리 학교를 자랑으로 여긴 적이 별로 없었는데 민망했다.







4.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자격지심이라는 게 참 끈질긴 존재다.

졸업 이후로 나름 좋은 커리어를 쌓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직도, 어디 가서 내 출신학교 얘기하는 게 좀 망설여진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런 학교를 나왔는데도 이렇게까지 이룬 게 대단하다' 

라고 신기해할 정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내가 나온 학교로 나를 먼저 판단해버릴까 봐 걱정된다.


자격지심은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지만 완전히 소멸되진 않았다.

나처럼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대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실망할 수 도 있는 말이지만 그게 정말 솔직한 생각이다. 내가 아무리 어디서 무슨 자격증을 따고, 엄청나게 많은 수상경력이 있더라도 결국 출신 대학교 이름 하나만으로 지능과 수준이 한 방에 평가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모교 재학생들에게 나의 능력을 적절히 인정받지 못하는 곳에서 오래 싸우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게 한국이던 회사이던 말이다. 사람마다 삶의 속도는 다 달라서 모든 집단이 인생에 단 한번, 같은 순간의 결과로 오랫동안 평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도 사회에 나와서 나태해질 수 있고, 못 했던 사람도 꿈과 목표가 명확해지는 순간 이룰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낸다.


사람은 성장하는 존재이고 그 성장의 시기도, 크기도, 다 제각각이다.

사회는 나에게 특정 시기를 강요했더라도, 그거에 굴하지 말고 나 스스로 계속해서 기회를 만들고 도전하라 했다.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회도 인정하는 날이 온다.



결론은,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 것이다.







마치며 +a



'누가 뭐래도 나의 길을 가겠다.' 

라는 생각이 살면서 나를 참 여기저기에 많이도 데려다 놨었다.


지금까지 한국을 포함해 총 6개국에서 살아봤다.

그리고 나는 해외에서 쌓는 커리어가 재미있다.

성별과 나이, 결혼 여부, 출신 대학, 지역을 모두 떠나 정말 내 실무, 언어능력만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에서 깨지 못했던 유리천장을 나는 해외에서 다 때려 부수고 다니는 중이다.


내가 나온 대학교는 이제 나의 성장드라마에 극적효과를 주는 존재다.

앞으로도 살면서 분명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상황, 실패들, 좌절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 성장하고 말 것이다.







다음에 학과장님을 다시 만났을 때,


"우리 학교도 저에게 자랑이에요." 

라고 말씀드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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