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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동 May 20. 2021

 


 또 이 불확실한 앞날 때문에 불안이 일어난다. 시흥에 왔다. 건강검진을 받아야 현장에 들어갈 수 있다. 검진을 받으려고 하는데 점심시간이 됐다.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어정쩡해서 밖으로 나왔다. 마냥 서성이기도 뭣해서 추어탕을 먹었다. 


팀장이 자긴 괜찮으니 밥을 먹으라고 떠밀었다. 자기 사람들에게 밥 한 그릇 안 사는 팀장. 서로에게 할 말이 없는 팀원들. 서로 알고 싶지 않고 친해지고 싶지도 않은 이들. 돈만 벌면 되는 사람들.


낮에 일하고 밤에는 내 작업을 하는 생활을 계속 곱씹고 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50이 넘으면 껍질만 남나. 어떤 것도 감각에 걸리지 않는다. 낮에 추어탕 집에서 본 텔레비전 속에는 내 나이대의 남자가 주름을 가리고 춤을 추었다. 매끈한 양복을 입고 요즘 인기 있는 젊은 트로트 가수들 뒤에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춤을 춘다. 허리를 흔들고 어깨를 털다가 다시 허리를 흔들고 두 다리를 교차해 스텝을 밟는다.

젊은 가수들은 옛날 노래를 부른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아름다운 강산'. 지나간 노래들이 연달아 나온다. 소리는 들리지만 흥이 오르진 않는다. 텔레비전에선 젊은 기억으로 늙은 사람들이 춤을 춘다.

기억은 아직 싱싱하다. 춤을 춘다. 웃는다. 흔든다. 노래한다. 엉성한 박수를 친다. 스텝이 바쁘다.


50대의 나이를 계속 살아야겠다. 더 살아서 60이 되고 70이 돼봐야겠다. 오늘 낮에 본  늙은 조경사의 손처럼 뻣뻣하게 마른 피부 속에 담긴 뭉툭한 뼈가 보일 때까지 살면 내 몸은 뭘 느낄까?  


젊고 싱싱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들의 젊음이 예쁘다. 적당히 늙고 돈 많은 이들의 여유도 부럽다.

나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는 세대들.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놀이들이 나와 다르다. 이게 근본적인 세대 간의 차이를 만드는 게 아닐까. 육신의 한계는 같지만 저장된 최초의 놀이 경험이 다르니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는 해석도 변한다. 같은 카메라 바디에 렌즈를 바꿔 낀 것처럼 세상을 다르게 본다. 세대와 세대는 마치 다른 인종 같다.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곤란함. 누구도 무시당하려고 태어나진 않았지만 그런 처지에 놓이는 사람들이 있다. 많다. 힘이 없어서 혹은 약해서, 권위가 없고 기회를 놓치고 영악하지도 않고 어리석고 모질지도 못해서 등의 이유로 그리 됐다.

 

왜 자꾸 예전과 비교하지. 세상은 계속 변한다. 기억을 업데이트해야 하고 그것을 근거로 미래와 비교할 수 있어야 발전도 하고 어쩌고 한다는데. 기억의 양이 적은 아이들처럼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팔딱거리면 좋겠다. 호기심이 상상력을 낳고 상상력이 노력을 낳고 노력이 현실을 낳아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의 주연이 되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를 가둔 그물의 코가 헐겁지 않다. 엉성하지 않다. 세상은 나보다 더 크고 힘이 세고 촘촘하다.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


마냥 낭만만으로는 살 수도 없고 과거만 보고 있으면 앞이 보이지 않잖아. 지금까지 겪어온 것에 앞날을 더해야지. 그 수밖에 없지. 희망도 피곤하고 후회도 피곤하고 기억도 피곤하다. 가벼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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