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동 May 21. 2021

바람

 아이가 다니는 학교 앞 공동텃밭에서 상추를 땄다. 3월에 심은 것들이 싱싱하게 자랐다. 촘촘한 상추를 솎아내듯이 큰 이파리를 따 봉투에 넣었다. 아내와 둘이서 두 봉다리를 챙겼다. 감사한 학교다. 이곳을 알게 되고 아이가 합격한 날 간만에 기뻤다. 살아오면서 뭔가를 성취한 게 별로 없는데 이날은 마치 내가 합격한 것처럼 기뻤다. 아내와 가끔씩 그날의 순간을 얘기한다. 마음에 오래 남을 기억이다.


신호에 걸려 멈춰 있다가 멀리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오월의 바람을 따라 이파리들이 빼곡하게 흔들렸다. 작은 색종이 같은 초록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흔들릴 때마다 초록은 짙어지거나 연해졌다. 재잘재잘 흔들리는 나뭇잎들. 살아 있어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나보다 훨씬 오래 산 커다란 나무는 이파리를 흔들고 새파랗게 어린 나는 햇빛 아래에서 나무를 보고 예쁘다 예쁘다 한다. 나무가 보여주는 풍경은 공짜다. 숨 쉴 수 있는 공기도 공짜다. 그러나 살아가려면 돈을 벌 줄 알아야 한다. 내겐 없는 능력이다. 나는 겨우겨우 풀칠만 한다.


살아 있는 동안 난 뭘 했나. 직업도 없고 쌓아 놓은 것도 없이. 그림을 그려야지. 만화를 만들고 그림책도 만들고 글도 써야지. 그래야지.


자아가 뭉개지지 않는 일을 하면서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젊은 건축가, 미술가,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다가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세상에 자아가 뭉개지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있나 싶었다.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러나 그런 일이 진짜 있을까? 우리 동네에서 탑을 찍는 마트 사장이 된다면 모를까 자아를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니. 나도 그러면 좋겠다. 하긴 성공한 예술가나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범주에 속할 것 같다. 자아가 뭉개지지 않을 수 있다면 발바닥이든 뭐든 핥아 줄 수도 있는데.


우리는 잠깐 젊었다가 오래오래 늙어간다.  내 몸이 헤지는 것을 해마다 느끼면서 그래도 살아있는 게 좋다고 생각은 한다. 살아있기 위해선 살아내야 하는데 생존에는 대가가 따른다. 몸을 갈아 넣는 노동이든 정신을 쥐어짜는 일이든 거저먹는 일은 없다. 살아가는 비용을 지불해야 연명할 수 있는데 점점 그게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들의 실업이 걱정이라고 하지만 노년에 다다른 이들의 실업도 심각할 것 같다. 더 이상 기댈 곳도 없고 버틸 체력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감도 있다.  시스템 안에서 나처럼 명백한 낙오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이렇게 살아야 하나? 모욕과 분노와 절망과 무기력을 매일 되새김질 하면서 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돈 버는 재주는 없어도 멍하게 앉아서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바라보는 재능은 있다. 한 반나절은 넋 놓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걸 재능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어제는 늦게 일이 끝나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고기가 불판에서 익고 버섯과 마늘도 같이 익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돼지라는 생명체와 마늘을 집어 상추에 얹고 입에 넣었다. 술도 마셨다. 가끔씩 얘기도 했다. 나도 말할 줄 알고 내 안에 담긴 이야기도 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이야기. 아주 먼 공간에서 혼자 오래오래 벽을 보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입가심으로 캔맥주를 사려고 들어간 편의점에서는 젊은 남자와 내 나이대의 늙은 남자들이 싸우고 있었다. 야, 이 씨발놈아! 너 몇 살이야! 너보다 적다 이 씹새끼야! 너 일루 와! 소주병이 깨지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과 말리는 사람들.


잠깐 말리다가 엮이기 싫어서 그냥 나왔다.

우리는 왜 이러고 사나.









매거진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