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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동 Dec 14. 2015


며칠

금요일 아침에 아이와 아내를 공항으로 마중했다. 짧은 여행을 간다. 제주도. 

70이 넘은  장인어른을 모시고 세 딸이 함께하는 여행이다. 내 새끼도 따라간다. 나는 수요일(12.9)에 집에 돌아왔다. 토요일(12.12)에 산청으로 가야 한다. 집에 있는 동안 할 일이 있었기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매달 그리는 표지 일이 하나 있다. 스스로 '단비'같은 일이라고 부른다. 표지 한 컷을 그려주고 작은 돈을 번다. 목수 일로 충분치 않은 수입을 메워준다. 빠듯한 생활에 내리는 단비. 그마저도 이번 달이 마지막이다.


수요일은 아내와 놀면서 내복을 새로 샀고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 집에 놀러 간 아이를 데리러 갔다. 두 집이 서로 잘 아는 사이라 커피 얻어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그 집 아빠와 술을 마셨다. 대리운전을 맡기기 싫어서 아내에게 오라고 했지만 거절. 술자리의 얘기가 길어질 무렵 아내의 짜증 섞인 전화를 받았다. 집에 돌아오고 잠이 들었다.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 전날에 아내와 내가 침대에서 나눈 얘기를 들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낮에 우동을 먹고 찬거리를 사고 와인 두 병을 샀다. 라면 네 개. 계란 한 판, 배추 하나.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전철역에서 막내 처제를 픽업. 내일 떠나는 여행 때문에 우리 집에서 하루 잔다. 처제는 한 달간 스페인에 있었다.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는다. 가난한 미술가이지만 작업이 나쁘지 않은지 여기저기서 그를 찾는다. 


처제와 아내는 수다를 떨고 나는 와인을 마셨다. 유쾌하게 취하고 싶었다. 전날의 무거운 얘기들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내가 있든 없든 집에는 아이를 둘러싼 일들이 일어난다. 때로 어떤 일들은 마음을 써야 하거나 무겁게 한다. 아내와 처제가 집 근처에서 저녁 약속이 있다. 일전에 디자인한 책과 관련해 출판사 사장과 만나는 자리이다. 나는 술을 마시고 있었기에 집에 있었다. 아이와 라면을 먹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아내와의 통화 어느 지점에서 짜증이 났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인데 홀대받는 느낌이 들었다. 섭섭한 기분이 들자 심사가 뒤틀렸다. 결국 짧게 말다툼을 했다. 서로 날카로워진 상태를  알아차릴 정도의 시간을 같이 살았다. 아내가 양보해서 분위기는 풀렸다. 







꼬박 하루 반을 혼자 집에 있었다. 잠을 잤다. 자도 자도 졸리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 하루 이틀 정도를 내리 침대에 누워 있는다. 잠을 자야 풀리는 게 있는 것이다. 약속한 일을 못할 것이란 판단이 섰다. 출판사에 전화를 해 이번에는 못한다는 말을 했다. 안된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찾는데 이번에는 안된다. 그림의 톤이 같아야 한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시리즈이기에 그렇다.  이해할 수 있다. 마감을 늦추는 선에서 합의를 했다. 그렇지만 부담으로 남는다. 전화 말미에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도 걱정이 된다. 2주의 시간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림 도구를 챙겼다. 종이와 물감과 붓. 







집을 나서면서 내 방을 찍고 싶었다. 내 책상과 내 컴이 놓인 자리. 내 모든 바람과 기대와 실망과 한숨이 있던 자리이다. 저 의자에 앉아 보낸 시간이 제법 된다. 그때 들었던 노래며 팟 캐스트며 컵 라면과 술과 커피. 짜증과 드물게 있던 만족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두고 가야 한다. 벽에 걸린 최근의 그림을 봤다. 뭔가 될 것 같은 희망의 싹이 보이던 그림이다. 저 그림으로 뭐든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잠깐이었다. 어쩌면 그런 예감들은 부질없는 안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미아 사거리에서 팀장을 만났다. 미아리가 예전과 다르다. 시야에 꽉 차게 들어오는 상점들의 풍경이 요란하다. 저기에 있는 가게들과 그 가게의 주인들은 모두 잘  먹고사는 것일까? 모두  먹고살 만한가?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도 될 만큼 이 동네는 괜찮은가? 그런 잡다한 생각들이 잠깐 일어났다. 막히는 토요일의 서울을 예상하지 못했다. 파주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 배가 고팠다. 깜박 잊고 점심을 못 먹었다. 팀장의 차를 기다리면서 포장마차의 튀김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급하기에 망설이다가 김말이 일인 분을 샀다. 2,500원. 손에 들고 급하게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김말이가 식었다. 급한 대로 허기를 달랬다. 


공구를 잔뜩 실은 승합차가 서울을 빠져나갈 무렵에는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깜깜한 밤의 고속도로를 달려 남쪽으로 내려왔다.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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