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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동 Jun 19. 2023

평범한 의자

 6월 15일. 각자 만들 의자에 대한 아이디어 발표가 있었다. 나는 어떤 의자를 만들 것인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러이러한 형태를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자리였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를 생각했다. 나를 생각하면서 의자라는 사물에 관해 떠올린 짧은 생각들. 






아르네 야콥센 Arne Jacobsen 1902.2.11 

핀율 Finn Junl 1912.1.30 

한스 베그너 Hans Wegner 1914.4.2 


덴마크에서 태어난 가구 삼대장. 에그 체어, 스완 체어, 드롭 체어. 위시본 체어, 라운드 체어, 그 밖의 이름을 모르는 근사한 체어. 현대적인 디자인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불리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만들어낸 의자의 이름들. 







디자인은 사람과 사물과 생활 사이 곳곳에 있다. 업무든 휴식이든 뭐든 우리들이 깨어있고 움직이고 잠자는 모든 시간에 사물이라는 이름의 디자인이 엮여 있다. 


디자인의 본질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맞는 것 같다. 


앉는 행위를 위한 사물의 이름을 의자라고 부른다. 







자간이라고 하는데 글자와 글자,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간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려면 '사'와 '랑'을 붙여 쓰고 그 두 글자 사이에는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이 의미를 드러낸다. 이게 자간이다. 너무 좁으면 가독성이 떨어지고 넓어도 읽기 힘들다. 적절한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의자에 대입하면 인체공학과 비슷할 것 같다. 


편안함과 안정감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내야 한다. 도구와 사물이 발전하면서 몸에 영향을 준다. 자동차와 스마트폰과 랩탑이 삶의 형식을 바꾼 것처럼. 







사람의 몸은 아주 느리게 오랜 시간이 쌓이면서 변한다. 의자는 도구다. 앉기 위한 도구이면서 앉는 목적에 따라 여러 형태가 있다. 공부나 업무를 위한 의자, 식사와 여유시간을 즐기는 목적의 의자, 얼른 먹고 일어나야 하는 의자, 독특하거나 고급스러운 형태여서 사람들의 눈을 끌고 사용하는 사람의 우월한 취향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깔고 있는 의자, 유아를 위한 의자, 노인을 위한 의자,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의자, 시장 좌판에서 생선을 파는 사람의 의자, 공부 좀 한 사람이 앉는 의자, 일자무식의 의자. 수많은 의도를 지닌 의자들.


앉을 수 있으면 모든 게 의자가 된다. 







집안에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의자는 당연히 내 책상 앞의 의자다. 이케아에서 샀다. 등받이가 유동적이고 허리와 엉덩이를 적절히 받쳐주고 좌판에 쏠린 몸무게를 분산하면서 장시간 앉아 있어도 피로를 덜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분야의 최고급은 따로 있다. 휴먼스케일, 허먼 밀러 그리고 또 더 있는데 생각나지 않네. 우연히 들른 매장에서 휴먼스케일의 의자를 본 적이 있는데 보는 순간 확 마음이 당겼고 앉아보고는 갖고 싶어졌다. 텍에 적혀 있는 가격이 안 좋다. 매장 직원의 설명은 의사나 법조인들이 주로 찾고 작가 선생님도 많이 산다고 한다. 나는 선생님도 의사도 아니어서 쩜쩜쩜. 


노가다들은 아무 데나 앉는다. 엉덩이만 붙일 수 있으면 앉고, 등만 닿으면 눕는다. 잠깐이라도 쉬는 게 꿀이어서. 







사람의 몸을 편안하게 받쳐줄 수 있는 등받이와 뒷다리의 각도, 좌판의 넓이와 길이, 40kg~120kg의 몸무게를 견딜 수 있는 안정적인 구조, 식당, 거실, 책상, 도서관, 카페, 편의점, 노점 등 어떤 공간에 놓여 있는 의자인가? 


발표한 의자들은 주로 집안에 놓일 수 있는 게 많았다. 그러면서 저마다 필요한 요소들을 반영했다. 편의점이나 사무실을 위한 의자가 아니라 혼자 있거나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나를 유지할 수 있는 성격의 의자들이었다.







특이하고 독특한 것을 넘어서는 평범함. 평범이라는 토대 위에 올려진 특이함이 의자를 디자인하는 일의 어려움이다. 일단 앉았을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앉고 나서 10분도 안돼 몸이 뒤틀린다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디자인이라 해도 쓸모가 없다. 


반면에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공간에서는 의도적으로 짧은 시간만 앉아있게 유도한다. 높이와 각도와 착석감을 이용해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몸이 뻐근한 불편함을 느끼고 자리를 일어나게 한다. 회전율이라고 부르는 그것. 







비례를 보는 감각. 다리와 좌판, 좌판과 등받이, 다리의 각도와 굵기.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폭과 길이와 굵기와 넓이가 전해주는 감각.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것인가? 거추장스러운 것 다 걷어내고 꼭 필요한 것만 남기면서 그것들의 형태가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답고 세련되고 우아한 어떤 형태를 찾아내고 자기의 방식으로 소화해 만드는 일을 생각하다 보면  그냥 저 구석에 있는 의자가 다시 보인다. 골치가 딱딱. 







별생각 없이 보던 것들, 뭉툭하게 알고 있던 것들. 다리, 좌판, 등받이의 결합으로 우아하고 예쁘고 근사한 어떤 예리함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형태를 찾아낸 사례가 몇몇 있지. 


나무 의자는 식탁과 어울린다. 


나무는 사무용 의자처럼 장시간의 노동을 유지할 수 있는 편안함을 느끼기는 어렵다. 나무 의자의 용도는 보여주는 몫도 있다. 하드우드로 만든 고급스러운 느낌의 식탁과 의자가 거실이나 공간의 느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안다. 가구 한 두 개가 공간의 인상을 바꾸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실용성보다는 느낌의 영역인데 느낌은 수치화되기 어렵다. 취향도 비슷하다. 취향은 그 물건을 선택한 사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준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책장을 보여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는 소리를 한다. 취향이 사람을 보여준다는 의미겠지. 당연히 옷이나 영화, 음악 같은 취향이 관계되는 분야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나무로 만든 의자는 실용성보다는 취향을 드러내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미세한 차이를 이용해 새롭거나 기존의 취향을 넘어선 것을 만든다. 앞선 뛰어난 사람들이 많으니 넘어서기 어렵다. 그러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낸다. 이것도 재미있다. 하늘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새로움은 나타난다. 사람의 호기심이 그렇게 한다. 







0.5mm 사이로 양 한 마리가 지나간다. 


디자인에 접근하는 방식이 크게 두 갈래가 있는 것 같다. 특이하고 독특한 어떤 지점을 생각하는 사람과 평범하면서 색다른 지점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앞의 것은 진취적인 기질의 사람들인 것 같고 뒤의 것은 보수적인 기질인 것 같다.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할 수는 없으니 큰 줄기로는 두 갈래의 입장으로 귀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보수적인 타입이다. 젊어서는 피가 뜨겁고 경험이 부족하고 마음이 꼬였으니 좀 달랐겠지만 피부의 나이테가 늘어가면서 원래의 기질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0.5mm 사이로 양 한 마리가 지나간다. 


타이포 그래피와 가구를 만드는 일은 평범하면서 독특한 어떤 것을 만드는 일이란 점에서 닮았다. 알파벳이 주어진 기호의 숫자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의자도 다리의 개수와 좌판 등판의 요소를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을 벗어나면 다른 것이 된다. 다리가 세 개든, 네 개든, 하나의 기둥에 십자 모양으로 퍼진 발판이든 의자를 구성하는 요소는 변함이 없다. 단지 기본 요소를 어떻게 활용하고 변형할 것인가, 이게 관건이다. 거기에 더해 소재의 활용도 있다. 금속, 가죽, 목재, 플라스틱 등의 확장과 변형들. 


크게 보면 한정된 재료들인데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0.5mm 사이로 양도 지나가고 소도 지나가고 악어도 산다. 그만큼 작은 차이가 모여서 큰 느낌의 변화를 만든다. 






평범한 것을 만드는 게 어렵다. 이미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사람들도 여전히 나타난다. 그렇게 인류가 만든 것들이 변화한다. 매일 들고 다니는 셀폰이 불과 30년 전에는 다이얼을 돌리는 방식이었다. 집안의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각 집에는 전화기 한 대가 있었고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누구누구 바꿔주세요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당신 집 딸의 친구다, 혹은 애인이다 그래서 댁의 따님과 할 얘기가 있으니 바꿔달라고 인사를 한다. 내 딸은 댁 같은 사람을 모른다고 하니 이만 끊겠다고 한다. 한 가정의 공동 통신수단이 이제는 개인의 폰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삶도 변했다.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같다. 






의자의 기본 틀은 변함없지만 앉는다는 기능 외에 어떻게 앉는가, 앉아서 뭘 하려고 하는가에 따라 의자가 변한다. 발표 중에 "의자에 앉아서 내가 하고 싶은 음악 작업에 푹 빠지면 좋겠다"는 말이 귀에 남았다. 나도 그런 의자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앉으면 마법처럼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의자. 어쩌면 애플이 만든 랩탑들이 그런 게 아닐까. 애플의 맥북 뚜껑을 보면 열고 싶고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극하는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다. 



어쨌거나 의자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의자의 실마리로 곡선과 질감의 대비를 잡았다. 이 요소를 이용해 평범하면서 은근히 우아하고 예쁜 의자를 만들어 보자. 다리는 네 개, 등받이 하나, 팔걸이 둘. 그리고 앉으면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고 자극하는 요소가 있으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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