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 불명.
난 그들의 고통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재 속에서 살았습니다.
난 외동딸이 아니었어요. 무에서 솟아난 또 다른 아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받았다고 믿었던 모든 사랑은 가짜였던 거예요.
수취인 : 서류 또는 물건을 받는 사람 | 불명 : 명확하지 아니함 | 수취인 불명 : 서류 또는 물건을 받을 사람이 명확하지 아니함.
다른 딸은 수취인 불명의 편지이다. 쓰는 사람은 있지만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은 수취인 불명의 편지.
"그 아이는 쟤보다 훨씬 착했어요."
타자와의 불가항력적이고 지속적인 비교.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비교당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심지어 내가 그런 운명의 소유자라는 것을 갑작스레 알게 된다면? 본의 아니게 알게 된 그날의 기분을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아니 에르노 그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존재조차 모르는 언니와 평생을 비교당하며 살아야만 했다. 자아가 올바로 서있는 어른조차 타인과의 지속적인 비교는 삶을 피폐하게 한다. 성장기의 어린아이에게, 심지어는 성녀로 취급되는 타인과의 지속적인 비교는 한 아이의 자아를 갉아먹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그 아이는 어린 성녀처럼 죽었어요."
나는 꽤 많은 과거와 추억들이 시간 속에서 힘을 받으며 미화된다고 생각한다. 지네트는 6년 동안 세상의 향기를 맡다가 세상을 떠난 어린 소녀이다. 평균적인 인간의 수명을 생각했을 때 6년이라는 시간은 아직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 같은 시간이다. 아직 피지 않은 어린아이의 변화무쌍함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일곱 살의, 여덟 살의, 열 살의 지네트를 겪어 보지도 않은 부모님은 그녀를 “세상 둘도 없는 착한 아이”로 성역화하여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딸은 마음속에서 배제하며 기어이 그 아이의 삶에 생채기를 낸다. 지네트는 신앙심이 깊어 착한 아이가 되었나.
형제자매 사이는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이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태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내가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동생이 태어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어린 에르노는 언니와 자신의 생과 사를 연속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언니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그렇게 당신은 여섯 살의 나이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오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부모님의 언어가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이가 하나니까 가능하지, 둘이면 힘들었을 거야.” 이 말 한마디에 어린 에르노는 언니의 죽음이 비로소 자신을 이 세상으로 불러낸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자기 자신을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객체로서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 나는 믿는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내 안에는 세상이 묵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아스팔트에 무릎을 갈아본 적이 있는가? 말랑하던 살이 한 꺼풀 벗겨져 피가 뚝뚝 흐르고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고 있으면 왠지 숨겨진 뼈와 인사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찰과상을 입으면 너무나도 쓰라리고 아프다. 소독약을 듬뿍 부으면 어린 마음에 세상에.. 이렇게 아플 수가 없다. 약을 바르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상처 난 부위가 간지러워진다. 상처 부위 근처를 조금씩 간질여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상처부위를 건들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가 문득 만져보면 흉터를 남기고 어느샌가 아물어있다.
마음에 난 상처도 몸에 난 상처와 다르지 않다. 작은 상처라도 내 마음에 박히면 여러 감정을 휘몰고 온다. 응급처치를 하고 가만히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간지러워지는 시점이 오고 너무 간지러워서 기어이 한 번쯤 만져본다. 괜히 만져서 덧나는 상처가 더 많지만 결국 상처가 아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만져보는 것뿐이다. 상처가 아물었는지 덧났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결국 만져보는 것. 직면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기억이 아득할 만큼 어느새 나 자신과 하나가 되어버린 너무나도 오래전에 얻은 상처. 칠순이 넘은 개인이 열 살 때부터 가지고 살던 상처를 기어이 꺼내어 기억하고, 회고하고 직면하여 종국에는 그 상처와 자신을 분리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어디에 자리한지도 모를 만큼 깊은 곳에 위치한 상처를 향한 발걸음을 뗀 것 자체가 믿을 수없는 용기인데도 강인한 그녀는 기어이 그 상처와 자신을 분리해냈고 자신을 옭아매던 많은 것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는 언니와 부모님 옆에 묻히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로부터 분리된 다른 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다른 딸은 결국 에르노 본인임을 매 순간 느끼며 살아낸다. 지금의 에르노는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내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용기 있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그저 지네트를 다른 딸로 여기고 싶었던 어린 에르노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나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에르노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작가 신유진의 말과 언어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추천사를 읽을 수 있으매 익숙한 기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