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는 누가 굽나요?
나는 그런 경험이 없었지만, 많은 직장인들은 회식자리에서 엠지의 효력을 제대로 느끼곤 한단다. 그건 엠지의 탓이 아니라 당신이 꼰대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싶다. 회식은 회사생활 중 가장 공적이지 않은 일이면서, 가장 사적인 일이 된다. 분명히 편안한 식사자리라고 해놓고 개인의 행동 사소한 말투까지 모두가 평가 대상이 된다. 인사고과와 관련이 없더라도 회식의 분위기에 따라 회사생활에 불편한 영향을 미치기 쉽기 때문이다.
자, 그럼 회식자리에서 고기는 누가 구워야 맞을까?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이 되어 상사를 뚫어지게 쳐다만 볼 것인가, 집게와 가위를 들고 한바탕 실력발휘를 해볼텐가. 우선 고기를 구워먹는 회식자리라고 전제한다면 아주 소심하게 본분에 충실할 수 있는 몇 가지 팁을 알려주고자 한다.
회식자리에서 할 수 있는 보여주기식 행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가장 대표적인 고기굽기
2. 수저 혹은 물티슈 놓기
3. 물컵에 물 따라놓기
4. 정말 맛있게 복스럽게 잘 먹기(지저분하게 말고, 식사예절을 잘 지켜서)
5. 아주머니가 반찬 내려놓을 때 같이 접시를 잡고 돕기
6. 가장 높은 상사 옆(모두가 피하는 자리)에서 경청하기
7. 마지막 나갈 때 신발 꺼내주기
이밖에도 방석 정리하기, 빈술병 잘 정리하기, 화장실 안가고 자리지키기 등이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회식자리에서는 굳이 고기굽기에 나서지 않더라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남길 수 있는 사소한 키포인트가 있다는 말이다. 제일 좋은 정석 코스는
고기는 제가 굽겠습니다(먼저 나서기) -> (상사가 끄덕이며) 그럼 자네가 구워봐 -> 네~(하며 어설픈 행동을 한다) -> (상사가 답답해하며) 어휴, 고기 안구워봤어요? -> 아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서투르죠(하며 겸연쩍어한다)
결론 : 집게와 가위는 그 테이블에서 가장 성격 급한 사람에게 갈 것이며, 당신은 성의는 가상하나 고기는 못굽는 사람이므로 그냥 못난놈에 그친다.
다시말해, 고기를 굽는다고 나선다고 해서 당신이 그 자리가 끝날 때까지 고기만 굽다 끝나지는 않는다는거다. 또 술문화가 과격한 회사라면 건배에서 열외되거나 일(고기굽기)에 집중해야하므로 조금씩 나눠마시며 눈치안보고 페이스조절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보여주기식 행동을 모두 다 할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중 한두가지만 기억해뒀다가 써먹으면 센스까진 아니더라도 눈치없는 놈은 되지 않는다. 물론 거기다가 몇 가지 더 팁을 제시하자면 이렇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티슈와 수저를 놓는다면? 우선 선방했다. 본인의 물티슈로 빠르게 손을 닦고 그 테이블을 한번 다시 슥 닦는다면 더 센스있다. 단! 절대 닦고나서 물티슈를 뒤집어 살피며 때가 얼마나 있는지는 확인하지 마라. 그냥 쓱 닦고 물티슈는 치워버려라. '어휴~ 정말 더럽네요' 라는 말도 절대 금지.
물컵에 물을 따를 때는 반만 따르거나 혹은 반보다 모자라게 따라라. 당신의 목적은 그들을 물먹이는데에 있지 않다. 물을 따르는 행동만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물통을 당신 옆에 둬라. 한두모금으로 모자란 누군가는 분명 물을 더 달라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시 물을 따라주면 된다. 식사시간 내내 정수기만 잘해줘도 된다.
아주머니가 반찬을 내려놓을 때, 거드는 척 접시를 받아들어라. 혹은 아주머니가 내려놓은 반찬을 1센치씩 미세하게 치우며 거드는 척을 하라. 이것도 그냥 제스쳐다. 행동이 크기 때문에 남들이 봤을 때 당신이 최선을 다해 상사들의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면? 나갈 때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주거나 신발의 방향을 돌려줘라. 아무것도 안해도 그거하나로 센스쟁이가 된다.
고기굽는 행동 하나로 엠지니, 꼰대니 하는 사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고기를 잘굽는 사람이 굽는게 맞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상대를 평가할 때 한가지 면만을 보지 않는다. 상대가 나를 생각하는 이미지는 종합적인 평가의 결과다. 고기하나 안구웠다고 눈치줬다? 그건 절대 아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보고, 선배가 꺼내는 수저를 받아챙겨서, 따라주는 물을 마시고, 상대방 얘기는 듣지도 않고, 고기는 맛있게 익은 것만 내입에 쏙쏙 넣고. 나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나오는 당신의 모든 행동이 가장 강렬한 행동인 '고기도 안굽고'에 귀결된다는거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회식으로 단합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사실 참석만 잘해도 절반은 이미 먹은 셈이다. 그 자리에서 마이너스가 될 행동만 안하면 된다. 하지만 무엇이 마이너스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센스있어 보이는 행동 한두가지만 해도 본전은 할 수 있다. 참고로 난 엠지후배와 함께한 회식자리에서 20대 친구들이 먼저 수저를 놓고 고기를 굽는 모습을 단 한번도 못봤다. 그냥 그랬다고. 엠지 언저리의 나는 이렇게 20대를 보내왔고 여전히 수저를 가장 먼저 놓는 선배로 살고 있다. 그대들이 할 수 있는 '복스럽게 먹기'에 대한 얘기를 안했다. 나는 그들이 복스럽게 예쁘게 먹는 것만 봐도 즐거운 사람중 하나다. 인상쓰며 억지로 앉아있지 말고, 먹으러 왔으면 먹는거라도 예쁘게 잘 먹는것만으로도 상사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