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추억이지
추억이라는 단어가 참 진부한 단어가 됐다. 라떼는, 사춘기때 친구들과 추억여행을 많이 다녔다. 가까운 경주나 부산이나. '추억'을 붙여서 여행도 가고 아이템도 많이 맞췄다. 물론 어른이 되고 언제부터인가 그런 추억놀이는 옛날 문물이 돼버려서 이제는 단어도 잘 안쓴다. 딸과 둘이서 강릉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경포해변에 앉아서 모래놀이를 하고 있는 딸을 한참 구경하고 있는데, 곁에 졸업여행을 온 고등학생 무리가 있었다. 한 반 정도가 온것 같은데, 무튼 처음에는 쭈뼛쭈뼛 사진찍고 욕하다가 갑자기 물에 뛰어들었다. 한 사람이 뛰어들고, 두 사람이 뛰어들고. 가을날씨라 제법 추웠는데 걱정스러우면서도 문득 부러웠다.
특유의 쎈척과 함께 아이들의 물놀이는 계속됐고, 짜증은 내지만 웃고있는 녀석들 표정을 보니 내 마음도 즐거워졌다. 사실 그 친구들이 오기전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이십대로 보이는 세명의 여성 젊은이들이었다. 숏팬츠에 가슴이 훤히 보이는 옷을 입고 열심히 사진을 찍던 이들이었다. 자꾸 쳐다보면 혼날까봐 곁눈질로만 그들의 날씬한 몸을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세 사람은 참 독특했다. 서로 대화도 없이 셀카를 찍거나 사진을 찍어주거나를 반복하고 있었다. '야~ 잘찍으라고~' 이정도의 대화? 거의 두시간 가량을 그렇게 사진만 찍고 있었다.
아무튼, 추억이라는 단어가 예전만큼 낭만적이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물놀이를 하는 고등학생을 보며 순간 낭만을 느끼다가도 SNS에 올리기 위한 소스를 만들어내느라 바쁜 이들을 보니 낭만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추억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예측은 할 수 있을것 같다. 추억은 어떤 방법으로든 남는 것이니.
아이와 병원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병원 입구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고 느꼈는데, 십년만에 땅콩빵을 처음 만났다. 나의 최애간식. 딸에게 물었다.
"땅콩빵 먹을래?"
"좋아~"
묻고보니 얘는 땅콩빵을 본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애다. 따끈한 땅콩빵을 받아들고서 아이한입, 나 한입 먹었다. 고소한 풍미에 푹 빠져서 '음~'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자 딸이 말했다.
"음~~ 추억의 맛이야"
응? 너는 땅콩빵이 처음 아니냐
"너 처음 먹어보잖아"
"응 처음이지"
"근데 추억은 무슨.."
"이제부터 추억인거지"
뭔가에 댕 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추억은 늘 과거형이지 않았나. 작정하고 추억을 쌓지 않더라도 언젠가 먼 훗날에는 그것이 추억이라는 과거로 남는다. 생각해보면 추억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 훗날 추억이 될 수 있고, 강렬했던 기억은 추억을 넘어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으니. 아이에게 추억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이제부터 추억이 된거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 추억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순간이면 다 되는거였다.
고등학생의 즐거운 물놀이도, 스무살의 예쁨을 담아내는 젊은이들도, 생애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만들어가고 있는거다. 꼰대의 눈으로 보면 고등학생은 낭만이요, SNS를 하는 젊은이들은 방만한 인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우리는 매순간, 추억을 쌓아가고 있다.
아이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네가 땅콩빵을 아느냐, 그 추운 겨울날 천원짜리 한장으로 스무개가 넘는 땅콩빵봉지를 잡아들고서 아직 식지 않은 그 땅콩빵을 한입 베어물었을 때 입안에 번지는 그 고소함을. 그러고도 아직 열아홉개나 남아있었던 넉넉했던 그 때 땅콩빵 아줌마의 넉넉한 인심을.'
반대로 아이는 말하겠지.
'엄마가 땅콩빵을 아느냐. 병원에서 모진 고초를 겪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나를 맞이하던 땅콩빵을. 엄마가 인심쓰며 사준 땅콩빵이 반가워 입에 넣었는데, 땅콩으로 빵이 될 수도 있다는 신기한 경험을 했던 나의 추억을. 추운 겨울이었지만 내 입속은 따뜻했다.'
sns를 인생의 낭비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들 중 일부다. 그러나 각자의 기억과 추억은 다르고, 그것을 저장하는 방식도 다르지 않을까.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오래된 앨범속 사진보다, 매일 들여다보는 나의 휴대폰 속 사진첩이 더 소중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