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 랜드> Review
영화는 비일상적인 출발로 극의 서막을 열고 있다. 가장 정적이고 고루한 일상의 지점을 뒤집어 춤과 음악을 비롯한 온갖 역동적 행위들이 가득한 축제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속 비현실적인 세계로의 초대이며 동시에 낭만으로의 초대이다. 수많은 인물들 속 한 명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가슴속에 강렬한 원색의 꿈과 감정을 가졌으나, 일상 속에서는 그것을 숨긴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정성스러운 초대장이라 여기면 좋겠다.
극을 관통하는 한 흐름은 바로 계절이다. 겨울로 시작해 다시 겨울로 끝나는 사계절의 순환은 자연의 시간이 어쩌면 인간과 아주 유리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결정적인 사건들을 겪는 사람의 시간과 달리 계절은 그저 흐를 뿐이라는 것. 속절없는 흐름 속에 우리는 자연을 벗어날 수 없어서, 붙잡고 발버둥 쳐도 결국은 흘러갈 수밖에 없는 삶이 계절로 표상되는 것이다.
매력적인 부분은 영화가 영화라는 허구성을 이중적으로 가지고 논다는 부분이다. 원색적인 색감들은 욕망, 꿈 등 청춘이 지니는 강렬함을 감각적 상징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그 색감의 배열들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한껏 연출한다. 하지만 그저 환상성 극대화에서 영화는 그치지 않는다. 핀 조명을 통해 주인공들의 독백을 비추고 있노라면 우리는 그 독백에 가장 가까이 대입되며 현실 재현의 영화로서가 아닌 말 그대로 허구적 환상 세계로의 편입을 경험한다. 이러한 환상적 장치들은 동시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영화가 연출된 허구적 공간임을 그대로 폭로하기도 한다. 미아라는 배우 지망생이 머무는 공간인 영화 세트장은 배경으로서 미아와 세바스찬이라는 또 하나의 허구적 층위의 인물들이 머무는 극 공간임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아와 세바스찬 각각의 인물이 가진 출발점에 대해서도 짚어보아야 한다. 배우 지망생인 미아는 대중이라는 막연한 대상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직업적 숙명을 가진다. 친구들과 파티에 가는 그녀의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녀를 군중 속 한 명이 아닌 그녀 자체로 바라봐줄 누군가, 그래서 그녀를 특별한 곳으로 올라가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정작 미아가 원하는 것은 대중의 시선이나 관심이 아닌 단 한 사람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사랑해줄 누군가. 그러한 그녀는 화려함 일색인 파티를 나와 우연히 듣게 된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세바스찬을 보게 된다. 그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음악에 몰두한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에 그녀는 반하게 된다. 열정으로 가득한 용감한 세바스찬이 바로 미아를 사로잡은 세바스찬이다. 세바스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가족들마저 현실을 살아가라며 자신의 꿈을 진지하게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연주할 수 없는 억압의 상황에서 만난 그녀이다. 물론 첫 순간 그는 다가온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리지만, 그녀가 신경 쓰이지 않았더라면 다음번 재회에서 기억할 리가 없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유일무이하게 서로가 품은 꿈의 원석을 알아봐 준 사람들이다. 서로에게 최고의 평가사이며 지지자인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아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에 세바스찬은 용기를 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목소리들에 마냥 솔직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미아는 배우라는 꿈을 꾸면서도 현실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는 배역들을 위한 나름의 타협을 찾는다. 그녀는 정말로 오디션에 지원하는 역할들을, 그 작품 속 연기를 하길 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진정한 꿈 자체가 아닌 꿈의 곁만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세바스찬은 그녀가 마음 저 깊은 곳에 감춰두었던 핵심을 건드려준다. 그리고 용기를 준다. 대단해 보이던 대중의 인정과 오디션 합격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무시해도 될 것으로. 꿈 앞에서 나약해지는 우리에게 높아 보이기만 하던 그 큰 산들을 세바스찬은 훌훌 털어준다. 그렇게 미아는 자신의 길에 매진하게 된다.
세바스찬의 열정을 그녀는 사랑했을 것이다. 그 열정을 품은 채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엿 먹으라 말해주는 그를 존경했을 것이다. 그 열정으로 그녀는 낯설고 어렵던 영역인 재즈를 사랑하게 된다. 동화된다. 세바스찬도 자신의 열정과 꿈을 사랑해주는 그녀를 보며 함께 꿈을 좇게 되었으리라. 그 둘이 리알토 극장에서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천문대를 찾아간다. 한밤 중 천문대에서 그들은 ‘비상’한다. 단순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자신으로 만나는 사랑은 삶에 비상의 순간을 선사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소피가 하울과 겪은 비상의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비상을 겪은 후 변화한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과 같을 수가 없다. 인생이 아무리 현실이라지만 단 한 번의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 마법을 어느 영화에서보다 아름답게 표현한 <라라 랜드>였다.
하지만 마법 같은 사랑의 시작 이후에 들이닥치는 현실이 있다. 이 자체를 비극이라고 여겨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정답은 없다. 감독만의 작은 의견은 결말에 드러난다. 서로의 꿈을 속삭이던 밤이 지나고 환한 아침이 오면 미아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그를 듣던 세바스찬의 눈에는 물이 새 곰팡이가 핀 천장 구석이 보인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신의 자존심도 굽히고 경쟁관계의 친구가 준비한 밴드에 들어간다. 미아도 그걸 반대하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꿈을 좇아가는 세바스찬을 사랑함과 동시에 그가 자신의 꿈을 위해 현실적 조건들을 마련하길 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의 밴드 활동 자체를 반대하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John Legend가 세바스찬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위대한 음악가가 되고 싶다면 우리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고. 이 말에 세바스찬은 설득당했을까. 지목 오빠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처음부터 세바스찬은 이 밴드가 그저 타협의 어느 지점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다만, 그는 그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 호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세바스찬이 밴드에 들어가고 바빠지면서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그 중간에 오버랩되는 장면은 함께 ‘City of love’를 부르는 장면이다.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아 그들은 노래한다. 결국 이 정신없는 삶 속에서 모두가 찾는 것은 단 하나, 누군가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찾았으나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서는 달랐다. 세바스찬은 관계 속에서 사랑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미아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던 일들을 꿈이라 여기고 행한다. 그녀라는 사랑이 이젠 꿈이 되었기에 그 꿈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미아에게 사랑은 달랐다. 그녀에게 세바스찬이라는 사랑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위해 달려 나가는 꿈을 포함한 의미였다. 세바스찬이 수입이 되는 밴드를 자신의 최종적인 꿈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길 바라며 자신과 함께 사랑을, 그리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길 바랐던 것이다. 그들의 대비는 영화에서 연속적인 시퀀스로 드러난다. 미아가 바리스타를 그만두고 공연장을 계약하고 대본을 쓰는 등의 일들을 진행하는 동안 세바스찬은 밴드의 계약서를 쓰고 최신식 양복을 맞춘다. 교차 편집으로 대비되는 둘의 상황은 그들의 사랑이 멀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 하나의 단적인 상징은 바로 ‘리알토 극장’의 폐업이다. 그들이 함께 사랑을 찾고 꿈꾸어 나가던 상징으로서의 극장은 현실에 치여 폐업하고 만다. 현실과 타협하고 본인이 신경 쓰지 말라던 대중의 시선과 사랑에서 위로를 얻는 세바스찬을 바라보는 미아의 심경은 복잡하다. 그럼에도 그가 그 자신의 꿈을 잊지 않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가을이 온다.
그들은 점점 달라져가는 상황에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서로를 필요로 하는 순간들이 있다. 간절히 함께이길 원하며 서로가 옆에 있지 않을 때는 그리워한다. 미아가 세바스찬의 빈자리를 느끼며 그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기거나 세바스찬이 단 몇 시간이라도 그녀를 보기 위해 집에 들러 식사를 준비하는 일 등. 미아가 자신의 투어 장소인 보이지로 함께 가주길 원하는 세바스찬은 그녀의 존재가 간절했기 때문이고, 미아 역시 자신의 꿈에 첫 발을 내딛는 연극 시연에서 단 하나의 예약석을 마련해둔다. 하지만 그 필요들은 충족되지 못한다. 각자의 상황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를 위하지 않았다거나 덜 사랑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삶의 주체로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물론 맞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가다 보면 내 힘으로 살아내는 순간들보다 살아지도록 내버려두는 순간들이 많아진다.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벌어지는 삶에 시시각각 대처하는 것뿐.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뿐. 영화도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달라지도록 흘러간 삶에 대해 그 어떤 원망도 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서로를 지켜내지 못한 두 주인공에 대한 질책도 않는다.
그녀가 묻는다. “Where are we?” 이 질문의 연속이 삶이다. 세바스찬은 알고 있었다.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 놓인 미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과의 사랑을 위한 재건축이 아닌 기회를 향한 매진이라는 것을. 그들은 다만 흘러가는 대로 갔고, 그들의 현재에는 각자의 선택에 따른 다음 길이 놓인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으로 가슴 깊은 곳에 묻힌 그들이 각자의 길에서 재회했을 때 영화는 ‘만약’이라는 작은 위로를 선물처럼 선사한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감정을 삼키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한 부분은 미아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처절한 절망, 좌절, 무너짐의 끝에 그녀는 결국 포기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다. 무언가를 잡으려 끝없이 달려 나가다 어느 순간 무너져 뒤돌아 떠나려 하면,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때 거짓말처럼 기회가 온다. 좇던 것이 나에게 온다.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 온다. 자신은 열정만 있고 재능은 없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같다며 극심한 두려움 끝에 있을 때 그녀에게 기회가 왔고 그 기회는 삶을 바꾼다. 그녀가 오디션에서 부른 독백의 노래가 많은 이들에게 인상 깊게 남았을 것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기에 이 영화는 나에게 위로의 영화였다.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의 무너지는 가슴에, 지난한 길 위에서 고단해진 발걸음에 오히려 가장 환상적이고 밝은 위로를 전해준다.
영화를 읽어내고 써 내려가다.
Film x Ulim, FilUm
by U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