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7일의 울림
아빠의 형이 죽었다. 곧은 자세로 입을 다문 채 발견되었다. 자던 중에 심장마비가 왔다고 한다. 신문이 너무 많이 쌓여 이상히 여기던 경비 아저씨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보름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겨울이었고, 전기장판 위에 방치된 사체는 부패가 심했다. 부검의는 시신 확인을 안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전했다.
보름 하고 이틀 전, 그러니까 12월 중순 즘 아빠가 목요일 저녁을 비우라고 했다. 오랜만에 아빠의 형님들께 우리 남매를 보여드리고 싶다 하셨다. 아빠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두 형님이셨기에,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알겠다고 했다. 둘째 형님만 나오셨고, 셋째 형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연락도 닿질 않았다. 식사 내내 아빠는 핸드폰을 식탁 위에 올려 두고 수차례 확인했다. 그날 밤 셋째 형님께 전화가 왔다. 공덕역에 왔지만 갑자기 길을 못 찾겠더라,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서 전화도 불통이었다,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왔다, 다음에 보자. 길 가던 사람한테 하물며 역무원에게 가서라도 물어보지 사람이 왜 그리 답답해요, 얼마나 기다리다 간 거예요, 밥은 먹었어요. 속상한 마음에 아빠 언성이 커졌다. 형을 나무라고 싶은 동생은 없을 텐데. 심란해진 아빠는 한숨을 쉬며 이제 셋째 형님은 정신도 말짱하지 않은 것 같다고 걱정을 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 이제 다시는 형님을 만나지 못한다.
7남매의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던 아빠는 이제 환갑을 바라본다. 수십 년 전부터 형님들 누님들 주머니 사정을 챙기고 소식을 확인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빠에게 형은 형이고, 누나는 누나다. 국민학생 아빠가 보던 청년 시절 건장한 형님의 모습이 선명하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총명한 형님이 여전하다. 하지만 세월은 형에게 탄탄대로를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늙고 약해진 모습만이 남았다. 그에게 돌려받지 못할 돈을 빌려주고, 밥을 사주고, 돌아갈 차비를 챙기는 동생이 된 아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저렇게 지내다가 신문에 나오는 고독사라도 하게 될까 걱정이라 말하던 아빠가 부고를 받았을 때, 시신을 안 보시는 편이 나을 거란 말을 들을 때 무슨 마음이었을까.
빈소를 차리고 돌아와 다음날 신년 특별 새벽기도에 간 아빠가 오열을 했다. 사람 붐비는 시내 한복판에서 형아 손을 놓친 막냇동생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죄책감, 연민, 그리움, 슬픔, 신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중에 서운함이 있었다. 빛바랜 삶이 초라해 스스로 저물어간 셋째 형, 끝까지 자존심 하나로 스스로를 벼랑으로 몰아간 형에 대한 서운함. 혈전 약이 떨어졌는데 살 돈이 없으니 돈 좀 보내 달라 한 마디를 못 해서 이렇게 동생 마음을 찢어 놓냐는 서운함. 잡아줄 손이 기다리는데 왜 내밀 지를 않았냐고. 미안하다고, 그렇게 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형 미안하다고.
장례식장에서 아빠의 형은 주인공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찾아 헤맨 친구들이 달려와 슬퍼했다. 옛 기억 속 찬란하던 그의 모습들이 반짝였다. 그를 원망하고 등을 돌렸던 인연들도 찾아와 오로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고독사의 장례에도 수많은 마음과 사연이 존재한다는 걸 몰랐다. 그게 우리 집 일이 될 줄도 몰랐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나는 재수를 결정했었다. 그때 아빠는 오래 근무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임원 승진에 수차례 미끄러졌고 정년은 얼마 남지 않았었다. 마음 편한 퇴사가 아니었다. 갖은 수모와 고생을 버텼다. 수능을 망치지 않았더라면, 4년 간 대학 등록금은 지원되는 상황이었다. 죄스러웠다. 아빠는 학력고사를 망치고 재수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늦둥이 아빠의 재수를 든든히 지원해줄 부모님은 곁에 없었다. 형제들 집을 전전하며 얹혀살던 아빠에게 재수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는 든든한 아빠가 되고 싶어 했다.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다. 나는 내 자존심에, 그리고 내 자존심 속에 엄마 아빠를 위해 더 나은 학벌을 갖고자 했다. 더 자랑스러워 지기 위해.
내가 놓쳐버린 등록금 지원도 모자라, 재수 비용은 어마어마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딸의 학비는 고스란히 엄마 아빠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 숫자까지 생각하면 목이 매였다. 용돈은 받지 않기로 했다.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했다. 비교적 편하게 버는 돈으로 좋은 선물을 사드리고 내 호강을 했다. 결국은 마음 편하게 돈을 쓰고 싶은 내 이기심이었다.
더 작은 곳으로 옮겨간 아빠는 고군분투했다. 내 과외 개수가 늘어갈수록 아빠는 화를 냈다. 그냥 부모가 주는 용돈으로 아껴 쓰고, 공부를 더 하라고. 다른 집 자식들은 교재 값까지 용돈을 타서 쓰는데 나 정도면 그래도 낫지 않냐고 나는 아빠에게 도리어 화를 내곤 했다. 그렇게라도 자랑스러워지고 싶은 내 마음을 몰라줘 속상했다. 가장 속상했던 건, 아빠의 자격지심 같은 모습들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제 너에게 용돈 줄 능력도 없어 보이냐고 꾸짖던 아빠가 작아 보였다. 아빠가 작아 보이는 것이 너무 싫었다. 왜 자꾸 아빠 마음의 바닥이 보이는 것 같은지, 그게 참 싫었다.
어느 날 TV에서 육아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데 멍해졌다. 한 아빠가 일곱 살 딸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었다. 딸이 불편해하자 의자를 가져와 척척 딸을 씻겼다. 딸을 위해 해결사도 되어주고, 그늘도 되어주는 작은 자상함들이 결국은 내가 바라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점점 더 엄마 아빠를 위해 무언가를 해 드려야 한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나는 나의 그늘이 영원하길 바라는 한 없이 어린애였다.
옮겨간 회사도 나온 아빠는 수십 년 간 쉬지 않은 몸을 돌보았다. 한낮, 드리워진 커튼을 통해 누런 햇빛이 방 안을 무기력하게 감싸고 그보다 더욱 힘없는 이불처럼 아빠가 누워있던 모습이 마음을 무너뜨렸다. 온몸이 무겁고 아픈 사람처럼 아빠는 한동안을 꼬박 쉬었다. 그 모습을 뒤로한 채 입술을 깨물며 집을 나서곤 했다. 돈을 벌러 가는 길을 비집고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아빠를 안아주고 싶지만, 아빠를 안아줘야 하는 상황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걸 무서워하는 내가 너무 끔찍했다. 옆에 가서 가만히 누워 보기라도 할 걸, 지금은 그런 생각도 한다. 감사히 용돈 받고 공부 열심히 하는, 아빠가 원하는 학생다운 모습을 더 보일 걸, 하는 생각.
아빠의 형과 나는 똑같았다. 사랑에 있어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아빠에게 기쁨을 주는 건, 혼자 씩씩하게 생활하는 내 모습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빠의 그늘에 기댈 줄 아는 자식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나의 만족만을 위한 자랑스러운 딸의 모습이었음을. 세상이 아빠를 작게 만들 때,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든든해할 줄 아는 것. 그게 더 잘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내밀어준 손이 기다릴 때, 기꺼이 잡을 줄 아는 것도 사랑임을. 평생토록 사랑하는 나의 그늘이실 테니까.
아빠를 위해 썼고, 닿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에 전합니다.
by U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