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ilU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lim Nov 04. 2017

특별하지 않은 너를 위해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Review 

   올해 늦가을의 기대작인 <리빙보이 인 뉴욕>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감독 마크 웹의 전작 <500일의 썸머>를 애정 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만의 감성이 담긴 신작을 기대하고 있다. 

  <500일의 썸머>가 썸머라는 여자와 톰의 사랑 이야기를 현실적이고 재치 있게, 그리고 동시에 섬세하게 풀어냈다면 <리빙보이 인 뉴욕>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일까. 


  어린 시절의 우리는 처음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는 산산이 깨진다. 나는 결코 유일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수많은 존재 중 어떤 한 존재이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내 옆에,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특별해 보이는 어떤 존재에 비교되기 시작한다. 그다음은 작아짐의 연속이다. 반짝반짝 빛나던 존재라 믿었던 나는 점점 그 빛을 잃는다. 퇴색의 과정이 곧 성장이라 여긴다. 고독에 빠지고 절망조차도 무색해질 무렵, 그 무기력의 한 복판에 위치한 인물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 토마스이다.


  토마스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청춘의 시절을 보내고 있음에도 삶의 열정, 의욕 같은 것을 가지지 못한다. 대단한 일을 꿈꾸거나 도전하기엔 스스로가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다 여긴다. 그와 동시에 막연한 욕구를 품고 있다. "I want to be better than them." 누구보다 특별해지고 싶은 지는 알 수 없다. 불특정 다수, 자신과 동일한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 그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불분명한 소망은 그의 삶을 더욱 허무하고 공허하게 한다.


  남들에 비해 나은 점이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그와 동시에 어딘가 한 구석은 조금 낫지 않을까, 그럼에도 특별함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 양가적 감정을 가진 청년은 사실은 소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자신에 대해 아직은 완전히 솔직하기가 어려운, 혹은 두려운. 막막한 미래를 떠올리면 불안하다가 무기력해지는.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품고 그에 매어 있는. 순수하지만 그리하여 오만하고, 누군가가 심었는지도 모르는 이상을 추구하는 치기로 가득하고. 자신을 모르고 사랑도 모르는, 오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소년.

  어딘가 익숙하고 또 깊이 공감 가는 모습이 아닌가. 

  토마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이며, 이 영화는 그러한 우리들과 우리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끝에서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토마스는 초반과 다른 모습이다. 굳이 모습을 '어른'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허무한 목표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어 지양하고자 한다. 그는 이제 혼자의 세계를 벗어나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남들과 다른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허황을 깨닫는다. 

그는 이미 엉망진창인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못난 모습이 가득한 자신을 용서하고, 함께 엉망진창을 살고 있는 주변인들을 용서한다. 

  이 변화는 그의 인생을 뒤흔들 사건을 마주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영화의 내용 언급이 이루어집니다.)

  영화의 도입부는 시대적인 상황을 짚으면서 출발한다. 토마스가 우리의 모습을 대변함을 말하는 동시에 전체적인 영화 스토리텔링의 틀을 잡아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영화의 형식은 바로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내레이션이 소설의 서술처럼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서술의 관점은 전지적이라 인물들의 입체적 면모를 직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들 각자의 사정은 관객에게 이미 주어지며, 그렇기에 관객인 우리는 단편적인 사건의 사실들로만 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각각의 속사정을 어림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 틀은 곧 극 중에서도 등장하는 제럴드의 소설임이 밝혀진다. 즉, 영화 전체의 형식이 극 중 등장하는 허구적 이야기에 해당되는 재미있는 형식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러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을까. 

 

  영화는 한 인물에게만 완전히 감정을 이입하여 감정적 홍수를 맞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누구를 악역으로 몰아가지도 않으며, 누구에게도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계의 단편만을 본다면 이 영화는 막장이다. 자극적인 소재들이 많고, 비현실적이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틀은 이 모든 것을 허구적으로 만들어주면서 우리가 아버지의 애인과 잠자리를 하는 주인공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하기보다 그러한 수단을 통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하도록 한다.

  핵심은 출생의 비밀과 천륜에 어긋나는 불효가 아니라, 토마스라는 소년을 사랑하고 보호하고자 했던 그 주변인들, 그리고 그들을 알고 이해하고 나아가 용서하게 되는 토마스이기 때문이다.


  신문 1면이나 TV 뉴스만 보더라도 현실에서는 더더욱 자극적이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우리와 동떨어져 있을까?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인생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이내믹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인들의 삶을 보아도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자국들이 가득하다.

  <500일의 서머>에서도 그랬듯, 감독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볼품없이 작은 우리의 모습들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며 그 모습들을 밉지 않게, 불편하지 않게 우리가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의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조한나가 계속해서 토마스에게 "너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에 큰 비밀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고, 이 세상 누구도 다른 이를 비난하기 어렵고 그 안에 이해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다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껍데기뿐인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토마스는 몰랐기 때문이다. 


  토마스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아버지 에단은 아들의 꿈을 짓밟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 인물에 그치지 않는다. 너무도 사랑하는 여자와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그리하여 친구의 아들을 평생 키우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산다. 재능이 없는 이에게 소설을 쓴다는 일이 어떤 상처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의 아들이기도 한 토마스를 보호하고자 한 용감하고 단단한 사람이다. 

  이렇게 뜯어보기 시작한다면 영화 속 모든 인물은 다 이해받을 구석을 가진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자살로 정상적인 남녀 관계에 두려움이 있는 조한나, 사랑하는 남자를 가슴에 묻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가슴앓이를 해온 신시아, 멀리서 늘 아들을 지켜보고 사랑하는 여자도 그리워하며 맴돌았던 재능밖에 없는 제랄드.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은 쉽게 판단 당하지 않을 자격을 가진다.

  그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아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자신이 평범하다는 좌절 다음 단계는 바로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수많은 이해와 마음과 관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 뛰어든다는 것.


  원작 소설의 제목이자 극 중 토마스를 주인공으로 친부인 제랄드가 쓴 소설의 제목인 <The Only Living Boy>가 어떤 의미일지 고민했다. 두 가지의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았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소년으로서 토마스. 뉴욕이라는 '세계'의 은유 안에서 그는 사실상 홀로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다른 한 가지로는 '유일'의 의미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검은 정장을 입은 군중 속 유일하게 흰색에 가까운 외투를 걸치고 대비를 이루던 인물이 토마스니까. 고민하던 중, 영화를 본 한 친구가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는데 그 의미가 와 닿아 나누고 싶었다. 극 중 소설의 작가는 토마스의 친아버지이기 때문에 제랄드에게 토마스는 세상 유일한 존재라고. 그렇기에 당연히 토마스라는 존재 자체가 유일하고 특별하다고. 

  

  우리는 우리의 삶이 조금은 더 낫길 바란다. 엉망진창이 되지 않기 위해 무수히 노력하고 소망한다. 하지만 이미 엉망진창이다. 기준은 무너졌고 이미 꼬였고 어긋났고 엎질러졌다. 이 엉망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특별하고, 누군가에게 특별하지 않은 채로.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면서. 우리는 엉망인 우리의 삶을 꾸려간다.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부치지 않은 편지 1> - 정호승



*제목 '특별하지 않은 너를 위해'는 지성철의 에세이집 <특별하지 않은 너를 위해> (2011, 바보새)에서 차용함.

*<부치지 않은 편지 1>, 정호승,「새벽 편지」, 1987(2007 개정), 민음사


영화를 읽어 내고 써 내려가다.

Film X Ulim, FilUm

by Uli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