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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lim Jun 11. 2017

사랑하기에, 꼭 ‘알맞은’ 노력으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Review

#정상과 비정상, 그 속에 상처받은 치유자 

   - 1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아주 오래 만지작거리던 세 편의 영화를 묶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긴 시간 동안 나는 이 영화들이 주는 메시지에 깊이 빠져들었고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며 의지하게 되었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의 경계가 익숙한 우리에게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질문을 던지고 더 나아가 따스한 위로까지 선사한다. 그들이 간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첫 번째 영화는 바로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은 다양했고, 박찬욱 감독의 팬들마저 의문을 가졌던 색다른 영화였다. 모 인터뷰에서 감독 스스로 자신의 골수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에 달렸다고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가 인간에게 가진 근본적인 시각이 따스함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영군(임수정)은 본인이 싸이보그라 믿는다. 물론 실제로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싸이보그이기에 밥을 먹을 수 없는 그녀는 전기 에너지로 몸을 충전해야 한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그녀는 일순(정지훈)과 병원의 다른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인물이자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일순이다.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에서 그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한 인물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영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을 해석해주는 역할도 모두 일순이 맡는다. 우리는 그의 시각을 통해, 정신병원에 갇힌 정신병 환자라는 편견 대신 인물 한 명 한 명 그 자체로서 바라보게 된다.     


 가장 극단적인 편견의 공간이 바로 정신병원이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우린 동정과 연민, 응원을 보내지만 정신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편견을 가진다. 지극한 비정상. 그들의 이름표이다. 하지만 서사가 진행될수록 그들과 우리 사이에 정확히 어떤 점이 명백한 구분선을 만들었는지 모호해진다. 한 캐릭터의 두드러진 특성을 정신병이라고 규정한다면, 역시나 개성 넘치는 우리는 과연 그들과 명백히 다른 정상 범주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 속에 정상적 인물로서 스스로 비정상이 되길 자처한 일순이 존재한다. 어머니에게 받은 깊은 상처와 그리움은 그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만들고, 외로울 때마다 양치질을 하는 병적인 행동을 일으킨다.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존재이다. 그런 그가 보이는 특징은 바로 ‘훔치심’. 다른 사람의 특징을 훔치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과 성격은 훔쳐질 수가 없는 추상적인 것인데, 정신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일순에게 자신의 성격을 도둑맞게 되면 그 특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자신을 압박하던 그 특성에서 벗어나 치료의 과정을 밟게 된다. 이는 극 중 ‘하얀 맨’이라 불리는 의사들의 기존 치료 방식이 제대로 환자들의 상황과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돌려서 꼬집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치유자 역할을 하는 일순 또한 상처받은 자이다. 그는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치유자로서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상처받은 치유자’이다.



 그런 그에게 흥미로운 상대인 영군이 등장한다. 영군의 외할머니는 스스로를 쥐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고, 정신병원에 끌려가 숨을 거두게 된다. 그때 할머니를 끌고 간 의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영군은 스스로가 강한 싸이보그라 믿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기계가 아니기에 감정이 존재했는데, 동정심이 자꾸만 하얀 맨들을 처단하려는 임무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하여 영군은 일순에게 자신의 동정심을 훔쳐가 달라 부탁한다. 자신의 동정심을 훔쳐달라는 황당한 부탁에 일순은 영군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는 영군이 매일 끼는 외할머니의 틀니를 껴보기도 하고, 영군처럼 자판기나 전구 등의 기계들과 대화를 해본다. 그는 진정으로 영군의 입장에서, 그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되어보는 노력을 한다. 자신의 상식과 기준에서가 아닌 그녀의 방법대로. 그녀에 대한 호기심은 연민이 되고, 나아가 사랑이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일순이 가지고 있던 깊고 오래된 상처도 꺼내 보듬고 치유해준다.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고 순수했고, 아름다웠다. 영군의 병의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밥을 먹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그녀의 건강과 생명에 위협적이기 때문에. 영군을 사랑하게 된 일순은 그녀가 밥을 먹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유품인 펜던트를 꺼낸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펜던트. 그는 그 펜던트를 개조해 영군에게 ‘라이스 메가트론’이라 소개한다. 이 장치는 영군의 몸속에 들어가 그녀가 밥을 먹으면 그것을 전기 에너지로 바꾸어 줄 것이라고. 그리고 영군의 세계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녀의 등에 문을 그리고 그녀 뒤에 앉아 속 빈 깡통 소리를 내며 그녀가 자신의 기계 몸속에 라이스 메가트론을 설치했다고 믿게 한다. 병원의 가장 깊은 지하 보일러실에서 둘이 나란히 앉아 라이스 메가트론을 넣어주는 시늉을 내는 그 장면은 그 어떤 로맨스 영화의 장면보다 더 감동적이고 로맨틱했다. 



 영군은 자신의 몸속에 라이스 메가트론이 들어갔다고 믿으므로 일순은 자신의 펜던트를 영군의 틀니와 함께 땅에 묻는다. 영군의 틀니와 일순의 펜던트. 그들의 가장 아픈 상처이다. 이제 그 둘이 없어도 그들은 서로가 있기에 버틸 수 있으며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이 사랑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고 아픈 이들이 서로의 상처로 서로를 보듬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일순은 영군에게 번지르르한 말로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는 정성 들여 쓴 명함 한 장을 내민다. 라이스 메가트론 전문 수리 기사 박일순, 보증기간은 평생. 그렇게 영군은 일순의 사랑에 기대 밥을 먹게 된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잘해주고 싶다. 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 곧 스스로의 기쁨이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기에 스스로의 마음에 취해 나의 방식과 기준으로 돌 던지듯 마음을 던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노력이 더 아름답게 빛나기 위해서는 그 노력의 방향이 상대에게 알맞아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방법으로, 상대가 필요한 것들을 위한 노력. 자신을 싸이보그라 믿는 영군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라이스 메가트론을 만들어준 일순처럼. 기본적이고 아주 중요한 이 원리는 연인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어떠한 관계들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번의 노력이라 생각하고 되돌아보자. 내가 생각했던 절망의 벽은 내가 나의 우물에서 나오지 않은 채로 다른 이를 안으려 했기에 생긴 벽일지도 모른다. 상대는 무엇을 필요로 했을까. 그리고 그 필요에 나는 단 한 번이라도 그 사람의 방식대로 응답한 적이 있었을까.



 정상과 비정상, 이 구분은 모두 나와 남을 다르게 구분하려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람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우나 때에 따라 아주 처참해질 수도 있는 작고 얇은 선 하나. 그 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상처받은 치유자이자 우리가 비정상의 범주로 밀어버렸을 주인공 일순은 노력한다. 우리가 또다른 비정상이라 치부할 영군의 믿음을 그 어떤 정상적 믿음보다 소중히 지켜주며 사랑한다. 그리고 스스로 치유받는다. 그의 헌신은 사랑하는 연인을 살리고 자신을 자유롭게 했으며 엔딩 장면에서는 무지개가 환하게 빛났다.


부디 당신의 아름다운 노력이, 어여쁜 헌신이 상대에게 꼭 알맞은 모양을 찾길 기도한다.



영화를 읽어 내고 써 내려가다.

Film X Ulim, FilUm

by U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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