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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n Oct 05. 2018

돌연변이와 크리에이티브

작은 점포 성공하기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생물의 진화를 ‘자연선택설’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한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유리한 형질이 종(種)의 진화를 이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최초의 우월한 형질, 즉 경쟁에 유리한 유전자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식물학자 드 브리스(H. de Vries)는 달맞이꽃에서 돌연변이 현상을 발견했다. 그의 ‘돌연변이설’은 생물의 진화가 간헐적으로 형성되는 ‘돌연변이 유전자’에 의해 이뤄진다는 이론으로, 진화는 비예측성과 확률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돌연변이는 대부분 생존에 불리한 열성 형질을 띄어, 실증적으로 종의 진화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자연선택설’과 ‘돌연변이설’은 현대 생물학, 유전학의 근간을 이루는 양대 이론인 만큼, 경제나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그 개념이 널리 인용되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적자생존(適者生存) 세계관처럼 오늘날의 경쟁 사회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명론적 접근이 어딘지 모르게 잔혹해서 일까. 우리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며 각자의 생존 의지를 다지곤 한다. 어쩌면 이 세상은, 한계를 안고도 작은 가능성을 향해가는 '돌연변이 유전자'들의 집합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공급과잉,

진화의 서막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밀도의 외식업체 수를 보유하고 있다. 2012 산업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외식숙박업체 수는 인구 1천명당 13.5개 꼴로 일본(5.6개), 영국(2.7개), 미국(2.1개)의 수준을 크게 웃도는 규모이다. 이 중 특별한 기술 없이도 적은 비용으로 창업이 가능한 외식업 프랜차이즈는 경기 침체 속에서도 꾸준히 증가해 왔는데, 대부분의 골목 상권이 포화 상태임에도 지난해 전국의 치킨·피자·커피 등 외식업 프랜차이즈 가맹점 수는 전년 대비 7.4% 늘어난 10만 6890개(2016년)를 기록했다.


포화상태인 골목상권에서 어떤 가게는 살아 남고 그 반대는 사라진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 평균 치킨집 11곳이 개업하고 8곳이 폐업한다고 하니, 그 생존 경쟁의 중심에 선 상점들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간절할까. 앞서 소개한 생물학의 관점에서 특정 종(種)의 개체수 증가가 종의 분화(또는 도태)로 이어지는 현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겠지만, 이들 상점의 개업과 폐업을 단지 적자생존의 프레임으로 들여다 보기엔 우리가 공감하는 삶의 무게가 너무 크다.


‘서비스 경쟁력을 키워라’, ‘맛으로 승부를 봐라’처럼 자칭 ‘생존 전략’을 외부의 시선으로 포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현실은 온통 제약뿐이기 때문이다. 창업 자본은 원하는 점포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고, 광범위한 홍보를 하기에도 역부족이다. 단기간에 매출을 높이는 경험과 노하우를 쌓기에도 어려울뿐더러, 문득 떠오른 참신한 아이디어는 미처 실행하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선점되기도 한다.


매일 새로운 상점이 옆 골목에 들어서고, 또 다른 상점에서는 새로운 메뉴를 출시한다. 이미 시작된 경쟁을 외면할 수도 없는데 찾아오는 손님은 예전 같지 않다. 이 작은 상점은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스펙 경쟁’에 올라 타듯이,
골목 상점의 경쟁은 이미 가격과 품질 경쟁을 넘어섰다.




작지만 조금 다른 가게,

돌연변이


상점의 첫 번째 생존 비법을 묻는다면 대부분이 ‘좋은 입지’를 선점하는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인구 유동량이나 접근성 등을 비교하다 보면 상점의 입지는 생존과 직결되는 요소임이 분명해진다. 같은 상점이라도 어디에 위치했냐에 따라 상점의 가치는 천차만별이 되고, 혹자는 상점 임대료로 그 가게의 매출을 짐작하기도 한다.


그런데 ‘좋은 입지’가 생존의 전제조건인 시대는 저물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높은 임대료와 권리금이 보증하지 않더라도, 주변 상권이나 역세권의 영향에 있지 않더라도 자신 있게 문을 여는 상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도를 보며 한참을 헤매고서야 그곳에 도착하지만, 불친절한 위치의 그 가게는 오히려 문전성시를 이룬다.


밀도. 떠오르는 동네 성수동과도 조금 떨어진 이곳은 속칭 A급 상권이 아니다. 그럼에도 밀도의 고객 흡인력은 특별하다.


보니스피자. 이 가게의 입소문만으로 해방촌이라는 작은 상권이 뜨거워졌다.


장진우 식당. 간판도 없는 이 가게는 지금의 핫플레이스 경리단길을 일궈놓은 주역이기도 하다.



이들 가게의 공통점을 애써 찾아 내거나 그럴듯한 비결을 포장해 내고 싶지는 않다. 단지, 이 작은 가게들에서는 골목 상권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힘(?)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과 (그것도 아주 멀리에서 부터!), 이 가게 때문에 딱히 갈 일이 없는 동네를 찾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일반적인 '입지조건'에 의존하지 않았음에도 성공한 가게가 되었다. 손바닥에 지도를 든 오늘의 소비자에겐 '좋은 목'의 공식도 무색해지는 걸까?


멜버른에 위치한 샌드위치 가게 재플슈츠(jafflechutes)는 상점의 입지조건에 의존하는 다른 가게와 분명한 차별점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샌드위치 가게는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되며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있다. 반대로 재플슈츠는 아파트 7층에서 샌드위치를 팔기로 했다. 물론,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리 없지만, 유쾌한 아이디어를 가진 이 가게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바다를 넘어 세계 곳곳에 소개되었다.


재플슈츠가 낙하하는 지점, 건물 옆 골목에는 샌드위치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스마트폰 앱으로 샌드위치를 구매하고 재플슈츠 건물 옆 골목에서 기다리면, 주문한 샌드위치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상호에서 눈치챌 수 있듯, 낙하산을 타고 말이다. 재플슈츠 샌드위치는 '입지조건'의 제약을 특별한 경험으로 뒤바꿔 놓았다. 맛의 차별화보다 더 큰 '경험 차별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조금은 엉뚱한 이 가게는 최근 멜버른에 이어 뉴욕으로도 진출했다.


물론 이들 사례만으로 상점의 입지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 수는 없다. 하지만 상점의 위치를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로 바라보는 것 외에, 입지의 제약은 또 다른 가능성이 개입될 수 있다는 시각을 제안하고 싶다. 제약을 깨는 돌연변이 상점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기회라면 충분히 환영할만한 소식이 아닌가!



돌연변이의 진화는

현재진행형



과거에는 골목마다 터줏대감 상점이 있었다. 중국집, 세탁소, 슈퍼마켓, 비디오가게.. 생김새는 서로 다르지만 간판의 색깔만 봐도 그 시간이 느껴지는 가게들 말이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이들 상점은, 골목을 오고 가는 이웃의 모습처럼 천천히 나이가 들었을 것이고, 누군가 이삿짐을 꾸릴 때 이들 가게도 하나 둘 문을 닫았을 것이다. 30년 전통의 맛집이 되어 골목을 지키고 있는 가게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간과 함께 기억 뒤편으로 흘러갔다.


1921년 소르본 광장에 문을 연 'puf'는 오랜 시간 동안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사랑받아온 서점이다.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경영난이 심각해져 한 패션 브랜드에게 매장을 내줘야 하는 상황까지 겪었다. 수많은 파리 시민들에게 각자의 지식과 추억의 상징 공간이 사라질 위기에서, 이 가게는 과감한 진화를 택했다.


책이 없는 서점 puf에서 책을 고르고, 기다리는 공간


puf에 방문한 고객은 매장에 비치된 태블릿pc를 통해 구매할 책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책이 만들어져 나온다. '에스프레소 북머신'이라는 조금 거창한 이름의 프린터가 그 비결이다. puf는 임대료를 낮추기 위해 매장 크기를 20평 남짓의 공간으로 줄이고, 대신 전자책을 즉석 인쇄해서 제본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고객은 일반 서점과 동일한 가격으로 300만 권 이상의 책을 접할 수 있으며, 심지어 절판 서적도 원하는 만큼 구매할 수 있다.


아주 매력적인 상품을 판매하고 있어도,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도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어떻게 손님을 매장 안으로 유도하는가'이다. SNS가 제법 홍보 효과를 낸다 하더라도, '알리는 것'과 '파는 것'은 결코 같지 않으니 문제이다. 특히, 기능이 분명한 상품이나 서비스일수록, 우연히 얻어걸릴 손님은 기대하기 힘들다. 안경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탈리아의 quattrocento eyewear. 비교하고 싶은 안경을 웹사이트에서 선택하면 동일한 형태의 종이 안경이 배송된다.


온라인 쇼핑은 대부분의 상품을 쉽게 구매하도록 만들어 주었지만, 안경만큼은 그렇지 않은 상품이다. 직접 써보지 않고는 섣불리 구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안경을 고르기 위해 여러 매장에 방문하는 일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에 이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안경 브랜드 '콰트로센토'는 웹사이트에서 고객이 선택한 안경을 하드보드지 샘플로 만들어 집으로 배송해준다. 실제 상품과 재질의 차이는 있겠지만, 고객은 매장에 방문하지 않고도 본인에게 어울리는 안경 프레임을 테스트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정성스러운 손편지와 함께 종이 안경을 봉투에 담아 배송해주는 안경점. 고객 만족도 뿐만 아니라 마케팅 차원에서도 분명히 좋은 아이디어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진화의 기회,

크리에이티브



많은 사람들이 디자이너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떠올린다. 디자이너라면 한 번쯤 본인의 얼굴을 그려 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들어봤거나, 또 누군가로부터 "예술하시는 분이라 다르네요."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그들에게 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다시 설명하느니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것이 가끔은 나을 때도 있지만, 나의 직업 정체성을 알리지 못해 적지 않은 아쉬움을 안고 살기도 한다.

이 글에서 나는 디자이너란 조금 더 새로운 질문을 구상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디자인은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호기심에 약간의 '다른 시각'을 덧붙이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 ('다른 시각'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이뤄지지만, 논리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직관'이나 '감성'까지 개입되기도 한다)


대부분이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것, 지금이 최선이라고 믿었던 것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더 많은 것들을 디자인을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사례는 여전히 성공 여부를 결론지을 수 없는, 현재 진행 중인 '다른 시각'의 예시이다. 결과론적인 평가를 차치하고, 생존 과정의 이면에 있을 법한 아주 작은 시각 차이,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소개하고 싶었다.


깨진 돌에서 주먹도끼가 탄생했고, 소라 내장에서 보라색이 태어났다. 인류가 경험한 모든 진화의 과정이 문 밖에서 일어났고, 사소한 관찰과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크리에이티브는 디자인 스튜디오 안에서만 탄생하지 않는다. 골목에서, 주방에서, 카운터에서 조금씩 정보를 얻고, 다시 질문을 해보고, 직접 실행해 보면서 인사이트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시각이 있다면 모든 곳이 실험실이 될 수 있다.



종(種)의 진화는 주어진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어떤 상상력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모두가 저마다의 제약을 가진 복잡한 생태계에서, 우리의 목표는 먹이사슬 최상단의 포식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 안에서 조금씩 나아지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계속 진화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




여전히 어렵고 예단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비즈니스이고 일상이다. 몸은 묶여있지만 생각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기에, 꽉 막힌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가끔은 외계인의 사고방식을 연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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