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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건하 Apr 20. 2022

내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

어느 누구도 우리들의 감정을 물질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어 본 사람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똑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고 해도, 체감하는 감정의 깊이는 천차만별일 거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응원하고 위로한다. 나는 그것들에 충분히 위로받지 못했음에도 그렇게 된 사람처럼, 고마워하고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의 한 조각을 기꺼이 내어주리라 한다. 전혀 위로받지 못한 사람과 완벽한 위로를 한 사람, 그리고 정말 위로가 된 줄로 착각하는 사람으로 변질된 전혀 위로받지 못한 나.



 앞서 '내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에 근접한 사람들은 대게 '어른'이다. 나보다 훨씬 더 농도가 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 죽을 만큼 아파본 경험, 큰돈을 잃어 본 경험, 그 속에서 얼마만큼 아파봤는지, 얼마만큼 좌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통 그 '어른'들은 본인이 느꼈던 감정의 크기가, 적어도 내가 겪었던 것들보다는 크다는 확신이 있기도 해서.





정말 웃기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수치화할 수도 없는 

감정의 크기를

감히 어느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 



 오래전, 오랫동안 키우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깊은 슬픔에 빠져 지냈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만큼 슬퍼하는 나 자신을 다잡아 보고자 친구를 만났다. 사랑하는 강아지가 죽어서 너무 슬픈데, 그것 때문에 내 일상이 망가지는 것 또한 슬프다 했다. 내 얘기를 들은 그 친구는 코웃음을 치며 '그깟 개 한 마리 죽은 거 가지고 뭐 그렇게 유난이냐.'라고 하더라. 나는 그 자리에서 분노했고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친구와는 연락도 하지 않는다.



 과연 강아지의 죽음으로 생겨난 나의 슬픔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친구의 눈에는 나의 슬픔이 얼마나 작아 보였던 걸까? 아마 그 친구는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진심으로 내가 유난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분노했던 건, 내 슬픔의 크기를 가늠하는 척조차도 하지 않아서였다. 난 그냥 아는 척해달라는 거였다. 너는 절대로 내가 될 수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으니, 내 슬픔의 크기를 가늠하는 척만이라도 해주길 바랬다.



 이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제 멋대로 눈에 보이는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 비교한다. 내가 너보다 더 힘들었어, 더 슬펐어 라면서.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도 요즘 군대를 보며 정말 편해졌다는 식으로 얘기하곤 하니까. 하지만 강제로 군대에 끌려간 것 자체에 한 없이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없는 것에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제각각 다른 타이밍으로 감정 버튼을 누르며 산다. 그 타이밍이란 건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는 정말 원초적인 본능 같은 거기 때문에, 어느 누가 더 힘들지도, 괴롭지도 않다. 

 


 나보다 더 크거나 작은 슬픔은 없다. 아니, 알 수 없다. 구태여 가늠하지 않고 싶다. 이미 튀어나온 그 슬픔의 잔해들을 주워 담아줄 사람이 되고 싶다. 눈물 흘리는 사람에게 말없이 손수건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 그런 사람들이 내게 많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내 슬픔은 오직 나만 느끼고, 오직 나만 없앨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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