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 네가 세상에 온 뒤 엄마는 혹여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를 돌볼 사람이 없을 것을 걱정해. 이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지.
‘내가 아프면 누가 우리 딸을…’ 이라는 생각. 엄마와 아빠가 둘이 함께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다면 어떡하나 하는 별 영양가 없는 생각 속에서 참 청승을 떨곤 하지. 할머니에게 맡겨야지 했다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없다면 어쩌지, 이모, 삼촌 그 누구도 없는 상황이라면, 그럼 어떡하지? 내 친구 중 누구에게 우리 딸을 맡길 수 있을까? 하고.
우리나라와 달리 영미권 국가에는 대부와 대모가 있어. 만약 엄마가 대부와 대모를 지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누구에게 그 자리를 부탁했을까? 이런 쓸모 없는 상상은 엄마 주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돼.
며칠 전에도 별스러운 생각을 하다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읽었던 시 한 편이 떠올랐어.
만 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시는 함석헌 선생이 가까운 벗을 잃고 난 후에 쓴 시야. 내 피붙이를, 가족을 맡길 수 있는 사람. 모두가 내게 등 돌려도 그만은 그렇지 아니할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 자체로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어 간다고 믿게 하는 사람. 이 시를 쓴 함석헌 선생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봐.
그 벗은 함께 공부했던 김교신 선생이었어. 두 사람은 죽이 잘 맞기도 했거니와 서로 마음이 지향하는 바가 비슷했던가 봐. 둘이 살던 시대, 우리나라는 일본에 침략 당해서 지배 당하고 있었어. 일본은 우리나라 흥남에 질소비료공장을 지었지. 여러 가지 위험하고 독성이 있는 물질도 다루는 곳이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공장에서 일을 많이 했는데, 슬프게도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는 차별이 많았어.
일본인과 조선인은 임금도, 하는 일도, 대우도 달랐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힘든 일을 하면서도 돈은 더 조금 받았고, 위험한 물질을 다루면서도 보호받지 못했어.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김교신 선생은 그 공장에 들어가게 돼. 그곳에서 일하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지.
그러나 공장의 유독 물질과 열악한 환경은 김교신 선생을 피해가지 않았어. 그곳에서 일하던 중에 티푸스라는 전염병에 걸리게 되거든. 병세가 악화되어 목숨을 잃고 말지.
이 소식을 듣고서 함석헌 선생은 앞서 읽었던 시를 썼어. 김교신 선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얼마나 믿고 사랑하는 친구였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지.
딸아,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고, 또 좋은 친구도, 나쁜 친구도 사귀게 될 거야. 그 과정에서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그 사람’과 같은 벗을 만나게 될까? 그렇다면 그건 정말 엄청나게 멋진 일일 거야.
저런 친구를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겠지만 저런 친구를 사귀었으면, 그런 벗을 만나거든 참 소중히 여기는 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돼.
더불어 딸아, 네가 누군가에게 저런 벗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해. 모쪼록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거든. 누군가가 너를 저리 여겨 곁에 두고 싶은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신의와 정직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아름다움을 알고 그 아름다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가기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