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일락 Aug 22. 2024

혼자 산다고 1인가구는 아닌데요...


스물둘 되던 해 9월. 나는 그때부터 혼자 살았지만, 1인가구는 아니었다. 혼자 사는데 어떻게 1인가구가 아닐 수 있냐고? 사전에서 찾은 ‘가구’의 정의는 이러하다.

한 집에서  기거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경제적 단위 



나의 첫 집이던 신촌기차역 맞은편 하숙집엔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나는 20인가구의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면 쇼핑백에 하이힐을 챙겨와 학교에서 갈아 신어야 했던 곳. 아찔한 비탈길 중간에 있던 그 집은 1층부터 3층까지 하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층에 화장실은 하나, 세탁기도 한 대뿐이었던 집. 아침엔 한바탕 화장실 쟁탈전이 벌어졌고, 세탁기의 빨래가 뒤섞이는 게 일상이던 그 곳에서 나는 1인가구일 수 없었다. 



대가족 틈바구니에서 어렵게 독립을 이뤄낸 후, 처음 가져보는 혼자만의 공간. 처음에는 그것으로 족했지만, 점점 꿈이 자라났다. 처음엔 복도 안 쪽에 있는 방으로 옮기고 싶었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야 1층 복도 안에 공실이 생겼고, 내가 아니면 누구도 방 앞으로 지나다니지 않는 고요를 누리게 되었다. 혼자 쓰는데 무려 더블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다음 꿈은 밖으로 난 창을 갖는 것이었다. 옮긴 방에는 이전 방보다 더 큰 창이 나 있었지만, 어김없이 창을 열면 복도가 보였기에 늘 창을 굳게 닫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기회가 왔다. 근처 빌라에 살던 후배가 이사를 가게 되면서 자신이 살던 집을 소개해준 것이다. 



밖으로 난 창은 물론이고, 널찍한 베란다까지 있던 그 집이 마음에 쏙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집이 아니라 방이었다. 방이 세 칸인 집을 여학생 셋이 나눠 쓰고 있었으니까. 셋이서 화장실 하나를 나눠 쓸 수 있다니. 같이 쓸 수 있는 부엌에 거실까지 있다니. 설렜다. TV 시트콤에서 보던 하우스메이트들과의 우정도 상상했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이었다. 처음 이사 온 날, 집의 문을 열자마자 부엌에 있던 사람과 마주쳤다. 수면바지를 입은 채 요리를 하던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인사를 건넨 후 방으로 사라졌다. 2년 가까이 한 집에 살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숨어든 사람들처럼 서로의 방에 틀어박혀 있다 누구의 인기척도 들리지 않을 때 재빨리 부엌이나 화장실을 사용했다. 거실은 비워두었다. 학교에서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제일 왼쪽 방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다. 내가 이사 가기 전 만났던 마지막 주인은 나에게 자신의 방을 소개해줬던 후배였다. 연락도 하고 밥도 종종 먹던 사이였는데, 그 집에 들어오자마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처음 몇 번은 서로의 방을 오가기도 했지만, 습관이 된 집에서의 침묵은 후배와의 사이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조용히 방문을 열다 서로를 마주치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놀람을 감추며 멋쩍게 인사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따로 만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취업과 함께 그 방을 떠날 땐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사회로 나와 같은 직업을 갖고 나서도 차마 연락하지 못했다. 우린 한때 한 가구에 속한 사이였지만, 가족은 못 되었다. 


초록. 나의 네 번째 방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단어다. 1년 반의 백수생활 끝에 갖게 된 직장은 논현에 있었다. 지도 앱을 켜 카키색 7호선을 따라 올라가다 발견한 초록동네. 네모반듯하게 구획된 그 동네 중앙에는 커다란 초록색이 있었다. 공원이었다.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다. 마침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있던 아파트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다. 서울 중심부를 벗어난 곳이어서인지 이전 방의 월세로 아파트에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엔 방이 아니라 집이었다. 복도식 아파트인 그 집 문을 열면 작은 부엌과 화장실이 있었다. 부엌을 지나면 2인 식탁 하나가 놓일 법한 작은 거실이 있었다. 거실의 미닫이문을 열면 방이 나왔고, 방의 반대편 끝에는 베란다가 있었다. 혼자 쓰는 부엌에, 화장실에, 거실, 방에다 베란다라니. 좋은 게 차고 넘쳤다. 인터넷에서 본 설계도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집이었다.


그래서였다. 집을 보지도 않고 대뜸 계약부터 해버린 건. 7호선 오른쪽 끝까지 한참을 올라 마주한 초록동네의 부동산. 전화로 보겠다던 방은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볼 수 없다고 했다. 괜찮다고, 계약하겠다고 하고는 계약금을 보냈다. 1동 1111호. 이제 막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뗀 내게 1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그 집은 다가올 미래의 약속처럼 보였다. 늘 1등으로 살 것만 같은 좋은 예감에 첫 직장생활을 응원하는 듯한 따스한 느낌까지 더해졌다. 


신촌의 방에서 초록동네 집으로 이사 오던 날. 그 날도 콜밴과 함께였다. 처음 독립할 때 챙겼던 짐보다는 많았지만, 용달트럭을 부를 만한 살림살이가 없었다. 그 대신 미니냉장고와 통돌이 세탁기, 전자레인지와 가스레인지, 하얀 식탁과 5단 서랍장, 무려 더블침대까지. 혼수에 맞먹는 살림살이가 새 집으로 속속 도착했다. 


이전 방에서 가져 온 플라스틱 침대 프레임에 이불을 덮고 방 한가운데서 잠들던 이사 첫 날, 한순간 깨달았다. 5년간 내가 얼마나 밝고 시끄러운 곳에서 매일을 잠들었는지. 지구대 맞은편에 있던 세 번째 방으로 가는 길에는 거의 늘 취한 학생들이 쓰러져 있었다. 여기 사람이 누워 있다고 112에 신고를 하는 일상이 익숙했다.



초록동네의 밤은 칠흑같이 검었고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가끔 가다 들리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뿐이었다. 내가 소리 내지 않으면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 곳. 온전히 내가 만드는 고요. 차가운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바스락대는 이불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내 집. 내 공간. 이제야 실감이 났다. 


지은 지 30년이 다 된 아파트였지만, 단장을 새로해 새 집 같았던 네 번째 방. 그리고 내 첫 집. 데이트도 안 해보고 결혼도장부터 찍었다던 고모의 젊은시절 이야기처럼, 현관문만 보고 덜컥 계약도장을 찍어버렸던 그 곳. 벽지에 창틀, 문턱까지 사방이 하얀색이었던 그 곳을 천천히 내 것으로 채워나갔다. 미닫이문에 화이트보드 시트지를 붙였다. 무엇이든 써도 되는 거대한 메모장이 만들어졌다. 거실 장식장엔 좋아하는 인형들을 앉히고, 현관문엔 핑크색 그림을 걸었다. 추석 때 회사에서 받은 선물세트 박스였는데, 액자로 써도 제법 근사했다. 쓰레기통에 들어갈 박스를 왜 현관문에 걸어두냐고, 쓸데없는 인형은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핀잔줄 사람이라곤 없었다.


일에 지친 퇴근길에도 현관문에 쓰인 1111이라는 숫자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던 집. 식탁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두고, 식탁의자에 벗어놓은 추리닝을 주워 입고는 정신없이 침대에 뛰어들던 집. 하얀 침대에 누워 몸이 뒤척일 때마다 삐걱대는 침대 소리를 들으며 하얀 천장을 보고 있으면 ‘아, 이러려고 일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던 집. 그 집에서 4년을 살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병을 얻고, 백수가 되었어도 마음 든든하게 해주던 집. 숨만 쉬어도 월세가 나간다는 생각에 불안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다가도 이 집의 월세를 내기 위해 기꺼이 새로운 회사로 출근하게 해준 집. 


서른이 되던 해, 그 집을 떠나 다섯 번째 집으로 이사했다. 나 다음 들어올 집의 세입자도 젊은 여자였다. 내가 출근한 사이, 엄마와 함께 집을 보러 와 계약까지 했다고 했다. 집에 이사 오던 해의 내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이사갈 집은 풀옵션이었기에 하나하나 사 모은 세간을 모두 그에게 팔았다. 그는 이사 갈 때 세간을 들고 갔을까, 내가 그랬듯 다음 세입자에게 팔았을까. 다음 세입자에게 팔거나 줬다면 이사 간 지 6년이 지난 지금, 그 집에는 내가 쓰던 침대와 화장대가 그대로 있으려나.   


새로운 회사는 합정이었다. 왕복 세 시간 거리를 꿋꿋하게 다녔지만 마음만큼 꿋꿋하지 못했던 몸은 이사를 외쳤고, 이직한 지 1년이 조금 지나 이사를 결정했다. 이번엔 6호선 왼쪽으로 가다가 하늘색을 발견했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불광천이었다. 


애정을 가득 쏟았던 네 번째 집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던 다섯 번째 집. 오피스텔이었던 그 집에는 커다란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 높이가 160센티미터 정도 되는 복층이 나왔다. 어릴 적 갖고 놀던 미미인형의 집 같았던 그 곳은 사실 나만을 위한 집이 아니었다. 그 집에서 나의 1인가구 생활은 끝이 났다. 새로운 가족의 등장과 함께. 


인형과 분홍이 가득하던 첫 집.
퇴근 후, 극세사 이불에 쏘옥 들어가 책 읽던 밤. 제일 좋아하던 시간.




글쓴이의 말 

<3인 1묘 가족입니다>의 2화입니다. 원래 2화에서 새 가족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신나버리는 바람에 집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3화에서는 다섯 번째 집에 함께 살게 된 새 가족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매거진의 이전글 1인가구의 시작은 도망에서부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