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 따님이 엄청 좋은 미국대학에서 유학하셨거든. 그런데 한국에서 결혼하시고 지금은 주부로 사셔."
"아깝다."
"뭐가?"
"그 분 능력이."
"나는 네가 아까워."
갑자기 내게로 말이 돌아왔다.
반백수 4년차, 그리고 육아 2년차. 그는 나를 아까워하고 있었다.
나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아직도.
아기가 100일이 조금 넘었을 무렵, 일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덥석 일을 받았던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조금 더 쉬면 일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프리랜서 일을 시작할 때 그랬듯, 일은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제 정말 일은 접게 되나 보다' 싶을 때쯤 다른 일이 들어오는 식이었다. 그렇게 아기가 돌무렵이 될 때까지 낮에 육아하고 밤에 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아기를 재우고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나면 시간은 자정. 그때부터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모니터 왼편엔 아기가 깨면 언제든 달려나갈 수 있도록 아기방과 연결된 홈캠을 켜놓은 채로.
프리랜서의 일은 마감이 촉박한 경우가 많았기에 베란다에서 커피 마시며 해 뜨는 걸 보고, 바로 아기의 첫 소유를 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피곤함이 쌓여 육아로도 일로도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던 날에는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겨울과 봄이 지나고 어느 덧 여름.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엔 불안했고, 시간이 지나자 편안해졌다. 육퇴 후엔 보고 싶던 예능을 보며 쉴 수 있는 하루하루가 이불처럼 포근해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그러는 와중에도 시시때때로 생각했다. 일했던 거래처를 하나씩 곱씹어보며 '왜 일을 안 주지?',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이런 고민은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도 당연히 말하지 못했다. 대신 한껏 뾰족하고 삐딱해져서는 일하는 그를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는 날이 늘었다. 아기의 돌이 가까워지자, 또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어차피 일도 안 들어오는데, 그냥 회사나 다시 갈까' 하는 마음에 채용공고를 뒤지다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결과는 서류탈락. 이또한 남편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아파트 단지에서 유아차를 밀며 바쁜 세상에서 혼자가 된 기분에 시달렸다. 유아차 산책을 하다 어느 날, 찬 바람이 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 것이다. 그 무렵의 나는 오지 않는 일을 기다리지도,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나서지도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오래 전부터 하고 싶던 일을 시작했다. 내 글을 내 손으로 묶는 일이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내듯 처음에는 거칠게, 나중에는 촘촘하게 쌓인 글을 묶었다. 마음에 드는 제목도 달았다. 돈 받고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돈 받고 한 어떤 일보다 좋았다. 매일 아기가 잠에 들면 비밀스럽게 옷방 한 켠에 마련된 책상으로 가는 일. 누구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고 내 글을 매만지는 일. 남편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눈치였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아기의 홈캠을 자신의 책상 옆에 옮겨두고, 아기가 깰 때마다 아기 곁으로 갔다.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게 해주려는 소리 없는 그의 배려였다.
행복했던 시절은 길지 않았다. 문화센터에 다녀온 날, 아기 머리가 뜨거웠다. 그날부터 열이 났고, 다음 날 소아과 의사는 이앓이 증상인 것 같다고 했다. 다음 날, 설사를 시작했다. 그날은 하필 일요일이었고, 일요일에 여는 소아과를 찾아 새벽에 택시를 타고 번호표를 받았다. 두 번째 의사는 말했다.
"장염이 오고 있네요."
그건 기나긴 태풍의 서막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사흘 정도면 나을 줄 알았던 아기의 병은 차도가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일주일 후에는 혈변을 봤다. 세 번째 의사의 진단 역시 장염. 그것도 심각한 편이라고 했다. 하루에 열 번씩 볼 일을 보는 아기도, 아기 곁을 지키는 우리도 지쳐가고 있었다.
아기가 아픈 지 2주가 지났을 때, 의사는 조심스럽게 입원을 권유했다. 의뢰서를 들고 간 대학병원에서 바로 입원을 했다. 출근한 남편은 아기의 입원 소식을 듣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왔다.
"내가 좀 더 챙겼으면 이렇게까지 안 아팠을 텐데. 나 때문에..."
"왜 너 때문이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이력서 마저 써. 여기 있어봤자 걱정하는 거 외엔 할 일도 없어."
이직준비 중이던 남편의 서류마감일을 일주일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다음 날, 다시 병원으로 온 그는 이직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이직하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바빠질 텐데, 아기가 또 아프면 방법이 없다고. 이직하고 나서의 상황은 모르는 일이고, 그때의 일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내 말에 그가 건넨 말.
"아기를 키우려면 우리 둘 중 한 명은 안정돼야 돼. 너도 지금처럼 프리랜서로 일할지 회사로 갈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고, 아기 어린이집도 언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이럴 때 나까지 불안정하면 안 돼. 나라도 중심을 잡고 있어야지."
더는 대꾸할 수 없었다. 회사를 나온 지 3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은 나의 방황. 그 방황 때문에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이 더 좋은 기회를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위로도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