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숲속
바람 냄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람에서 나오는 특유의 냄새가 있는데,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마치 기억의 숲속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분명 이 냄새, 내가 뭘 하고 있을 때 맡았더라?
기억의 숲속
꿀 같은 일요일, 느즈막이 일어나 빈둥거리다 점심을 먹고 글 작업을 했다. 커피를 조금 마시다가, 저녁에는 산책을 하러 나갔다. 오후에 비가 온 탓인지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쌀쌀했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의 냄새를 맡자마자 10년 전, 여고생이었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과 똑같은 바람 냄새였다. 미술학원에서 크게 혼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후드 점퍼를 입고 있었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성적도 애매했고, 그림 실력도 좋지 않았다. "이래 가지고 대학은 어떻게 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모의고사 성적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고, 계속 경쟁에서 밀려나는 기분이 들어서 침울했다. 바람이 불자, 지퍼를 더 높게 올리고 모자를 뒤집어썼다. "스타킹을 신었어야 했나?" 맨다리가 어쩐지 새 하얗게 뜬 느낌이 들어 허리를 숙여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 넘겼다. 아직 스무살이 되지는 않았지만, 스무살이 된다고 해도 크게 기쁠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 당장의 고민이 중요했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커다란 나무 아래의 벤치에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오늘보다 더 불행한 날이 과연 올까? 차라리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다시 뜨면 10년 후로 넘어가버렸으면 좋겠어. 시험도 보기 싫고, 그림도 그리기 싫고, 평가받는 것도 싫다. 이 모든 게 지나가버렸으면 좋겠어. "
단순히 바람의 냄새로도 나는 이날의 기억을 분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비가 온 뒤 습한 느낌과 쌀쌀한 기온까지 비슷했다. 이왕이면 좋은 기억을 떠올렸으면 좋았을 텐데, 온갖 고민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나를 꺼내버렸다. 내 소원대로 그 시기는 모두 지나갔다. 입시에 대한 경쟁을 치를 일도 없고, 성적의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지만, 지금은 또 지금의 고민이 다시 생성되어버렸다. "핫도그를 먹을까, 말까?" (응?)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바람을 깊게 맡았다.
10년 뒤, 그때도 이 냄새를 기억하고 숲 속을 거닐게 될까?
그땐 그랬지.
그땐 그게 힘들었지.
그래도 잘 버텨줘서, 고맙다.
글/커버사진 여미
yeoulhan@nate.com
가을냄새, 좋아요. :)
여미의 인스타그램 @yeomi_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