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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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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Aug 21. 2024

혼인신고 하다

신혼일기 1화

어렸을 때는 막연히 서른이 넘으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할 줄만 알았다. 

살다 보면 마음 맞는 사람 한 명은 있겠지, 그 사람과 어떻게든 결혼이라는 걸 하고 가정을 꾸리겠지, 나도 남들처럼 평범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다가오는 인연들을 기대하고 꿈꾸면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나 20대를 지나고, 30대가 되었을 무렵,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 맞았다고 생각했던 인연들은 지나고 보니 전부 나의 착각이었고, 진심은 먼지처럼 사라졌고, 이 모든 것은 전부 못난 나의 탓인 것만 같았고, 삐뚤어진 마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가버렸고, 못난 질투와 다툼이 반복되고, 또다시 나는 비관에 빠져버렸고.....


31살


나의 서른한 살은 암흑기였다. 가장 외로웠고, 가장 추웠고, 성난 사자처럼 비관에 빠졌다. 도저히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런 시기에 가장 가까운 지인들까지 내 미운 마음들이 닿아버렸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까칠해지기 시작했고, 공격적으로 변해버린 내 모습을 포용할 수 없다며 하나둘씩 내 곁을 또 떠나기 시작했다. 


사랑만 떠난 것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과도 다툼이 잦았고,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가족 문제가 겹쳐지면서 내 생활은 더더욱 최악의 길로 가고 있었다. 가족 안에서도 악몽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고, 우리 모두 병들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화병이 나서 집을 나가버렸고, 소통은 단절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작은 회사에서 영상 편집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회사에 출근을 하면서 이 모든 비극을 잠시나마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34살


3년 전, 우울했던 서른한 살 끝무렵에, 기적 같이 나와 꼭 맞는 남편을 만났다. 회사에서 직원과 아르바이트생으로 만난 우리는, 3년이 흐른 지금 눈을 떠보니 혼인 신고를 하러 함께 손을 잡고 구청에 걸어가고 있었다. 회사는 2년 전 자연스럽게 그만두었고 현재는 동네 골목에서 작은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남편은 디저트를 굽고, 나는 커피를 내린다. 


그렇게 우리는 24년 2월 26일에 혼인신고를 했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사람을 만났다. 

여전히 내 옆에는 많은 친구들이 떠나갔고, 가족 문제는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내 슬픔을 알아주고, 안아줄 수 있는 남편을 만났다는 것에 매일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혼인신고 하러 가는 날, 남편에게 예쁜 꽃을 함께 사러 가자고 했다. 


멀어진 인연들을 잊고, 흩어진 가족들에 대해 원망을 넣어두고, 예쁜 꽃들을 보면서 새 시작을 간직하고 싶었다.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근처 꽃집에 들어가자, 남편은 분홍색 장미가 가득 있었던 꽃다발을 맨 처음으로 가리켰지만, 나는 노랗고 커다란 튤립이 마음에 들었다. 



꽃집 사장님은 신난 표정으로 꽃다발을 만드시더니, 포장지 색의 느낌이 어떤지 내게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셨다. 하얀 장미 한 송이도 특별히 넣어주셨다며 남편에게 직접 건네주라고 미소 지으셨다. 꽃집 사장님의 겉모습은 철물점 운영할 것 같이 생긴 상남자 스타일의 아저씨였는데 마음은 낭만이 가득한 분이셨다. 아저씨의 섬세한 말 한마디 덕분에 그날 꽃다발을 받고 더 기분이 좋았다. 


내가 마음에 드는 커다랗고 노란 꽃을 받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은 기분이 들어서 만족했다. 남편은 그날 하루종일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다.  


집에 꽃병이 없어서, 남편이 생수통을 반으로 잘라서 꽃병을 만들어줬다. 


가게를 함께 운영하면서 근처 동네 골목 구석탱이에 7평 남짓 좁은 원룸에서 우리는 1년 동안 함께 살았다. (아니, 거미들과 같이 살았다고 해야하나....주르륵)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둘이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넓은 방에 혼자 남겨졌을 때보다 훨씬 포근하고 따뜻했던 1년이었다. 냉장고도 손바닥만했고, 싱크대에는 늘 거미들이 가득했던 그 집, 둘이서 서 있을 틈도 없었고, 대충 누워있을 공간만 겨우 가능했던 그 좁은 집에서, 지금의 남편과 시시한 농담으로 깔깔대며 정말 재밌게 알콩 달콩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경험으로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가는 길이 늘 꽃길은 아니더라도 함께라면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고, 행복하고, 편안할 것 같은, 그런 사람. 


그리고 우리는 두 달 뒤, 1년 내내 도전했던 청약에 드디어 당첨되어 조금 더 넓은 신혼집으로 이사를 갔다. 

내년 결혼기념일에는, 예쁜 꽃병을 함께 사러 가자고 해야겠다. 



신혼 일기 1화 입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들려드릴게요 :)


글/그림 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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