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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발가락과 15분

by 여미

뱀 세 마리한테 손가락을 물림 당했다. 첫 번째 뱀은 투명하고 하얀 새끼뱀이었고, 두 번째 뱀은 노란색 구렁이였고, 세 번째 뱀은 빨간 구렁이였다. 내 기억상 이렇게 세 마리한테 모두 물림을 당했다. 첫 번째 뱀을 만났을 때는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는데도 뱀이 하도 꽉 물어서 피가 철철 났다. 아무리 떼내려고 해도 내 손가락을 꽉 무는 바람에 떼어내지지 않았다. 뱀의 이빨자국을 보면서, 독이 온몸에 퍼지는 건 아닌가, 나 이러다가 죽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두 번째 뱀인 노란색 구렁이한테 또 물렸다. 그렇게 차례로 세 마리의 뱀한테 물림을 당하고 나서야 꿈에서 깨어났다. 놀란 마음에 손가락을 만졌다. 피는 나지 않았고, 뱀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오랜만에 점심 약속이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고 알람을 3개나 맞춰놨는데 이상한 뱀꿈을 꾸는 바람에 찝찝한 마음으로 한참을 침대에 멍하게 누워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내 손에는 뱀 이빨이 물려있는 기분을 느낀 채로 샤워를 했다. 내가 뱀인지, 뱀이 나인지 모르겠는, 묘한 정신으로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아침밥을 해 먹으려고 주방에 갔다. 이상한 감각에 느껴져서 손에 뱀자국이 찍혀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통은 남편이 요리를 한다. 남편은 요리를 아주 잘하고 솜씨도 좋다. 본인도 요리를 좋아하고, 내가 그의 요리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하면 더 좋아한다. 내가 주방에 와서 그릇을 꺼내려고 하자 남편은 뭘 할 거냐고 쫄래쫄래 쫓아와서 물어봤다. 남편은 내가 요리를 하는 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요리며, 설거지며, 모두 본인이 하기를 원한다. 그 질문의 뜻은 자기가 요리할 테니 주방에서 당장 나오라는 뜻이다. 나는 점심약속을 가기 전에 약을 먹어야 하니 약간의 쌀밥과 양배추찜과 김을 싸 먹을 거라며, 내가 직접 한다고 말을 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기도 했고, 남편은 한번 밥을 차리면 너무 진수성찬으로 차려서 가끔 내 소식 추구미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개미처럼 조금씩 먹는 게 좋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을 하고 도마와 칼을 꺼내자마자 도마가 미끄러지면서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는데 칼이 허벅지를 스치면서 상처가 났다. 놀란 남편이 와서 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피를 보고 다시 한번 뱀꿈을 떠올렸다. 뱀이 내 손가락을 물었을 때도 피가 철철 났는데, 지금 내 눈앞에도 피가 철철 난다. 그 순간 칼이 뱀처럼 보였다.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입을 벌리고, 내 신체를 물려고 잔뜩 준비하고 있는 뱀의 모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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