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텔의 화살 앞에 선 아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아버지를 믿었을까? 아버지의 실력을 믿었을까? 합스부르크 왕가의 게슬러 제독의 강압 때문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아들은 아버지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자신 있게 아버지의 화살 앞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전문가들은 믿음을 준다.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문가를 찾는다. 하다못해 외식할 때도 그냥 눈에 띄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기보다는 ‘잘하는 집’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은 물론 자본이다. 즉 돈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1급 호텔에서 1인 1실을 사용하고, 웨이터가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는 동안, 마이너 리그 선수들은 2인 1실을 사용하고, 햄버거로 끼니를 때운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실력의 차이 곧 돈의 차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돈의 차이가 사회생활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에게 전문가 즉 ‘최고’가 되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밤을 새우고, 서툰 것을 소화해 내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하고, 분초를 아끼는 시간 활용에다가 다른 것 다 잊어버리고 매달리는 집중 등이 필수다. 최고에는 최고의 대가가 따르는 법, 그 최고의 대가를 위해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사들은 어떤가?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그만큼 몸값이 올라가서 경제적 보상이라든가 지위의 상승이 따르게 마련인데 교사는 최고의 교사가 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을 사리지 않고 노력한다고 해도 따로 주어지는 것이 별로 없다. 자연 최고의 노력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자칫하면 타성에 빠져 하루하루를 지내려는 월급쟁이 교사에 지나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될 수 있다.
교직은 성직이라고도 한다. 성직자가 주어지는 보수와 상관없이 신의 일에 헌신해야 하는 것처럼, 교사도 보수와 상관없이 교육에 매진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교계에서 목회자를 비판할 때 ‘삯꾼 목자’라는 말을 쓰는데 어떤 목사는 ‘삯꾼 목자’라도 되자고 주장한다. 공감하는 이야기다. 교사도 월급이 적다고 하지만 가끔 내가 받은 월급만큼 일하고 있는가 반성한다. 가령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꾸벅꾸벅 졸 때 그 학생들의 관심을 끌만 한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학생들의 수업 의욕 없음만을 탓해 왔던 것. 기업체 연수를 맡은 강사가 연수생을 지루하게 했을 때 다음 강의에 초빙될 수 없음을 알기에 강의 기법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내용을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난 학생들이 졸아도 월급은 나오니까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보는 것이다.
잠시 자본주의 논리에 맞추어 교사의 길을 생각해 보았다. 즉 최소한 돈값이라도 하자는 논리였지만 한번 반성해 볼 일이다. 보상이 꼭 돈으로만 주어지는 것인가? 우리는 당연히 최고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 졸업생들의 뇌리에 ‘우리 선생님은 최고의 선생님이셨어.’라고 하는 소리를 최고의 보상으로 생각하고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학생들은 어떤 교사를 최고의 교사로 생각할까? 수업 잘하는 교사, 상담 많이 해주는 교사이다. 당연히 교사는 수업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과의 대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최소한 이것만으로도 출근 때부터 퇴근 때까지 잠시라도 한눈팔 시간이 있을까. 그런데 수업과 상담 외에 하나 또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전공 외에 특기 이상의 취미를 하나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근무 시간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그래서 교사는 퇴근 후에도 선생님으로 불리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