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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녀ㅣ이혜진OT Feb 10. 2023

나의 가난

작사녀 작업일기

  이 글은 훗날; 자서전을 적을 일이 있으면, 참고해야지 하며, 남기는 글이다.


  못 살다. 내가 자라온 환경은 경제적으로도 늘 부족한 못 살다였다. 일정한 수입이 아닌 아빠의 막노동 일은, 엄마에게 강인한 생활력을 주었지만 딱 그것뿐이다.


지독한 내 가난의 자국들


  나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고 면요리를 즐긴다. 수제비도 좋아한다. 일주일 내내 수제비만 먹었다. 엄마가 수제비만 해줘서, 이상했다. 수제비가 너무 질렸지만, 아무 말 못 했다. 왜 수제비만 먹어야는 지는 쌀이 없어서라는 것을 엄마와 마주 앉은 그 밥상에서 확인하기 싫었다. 지금도 칼국수, 국수, 라면 면은 다 좋아한다. 수제비만 뺀 면요리는 좋아한다. 청소년기 현실을 알게 해 준 그 수제비는 상처로 남았다.

  기름보일러인데, 너무 춥다. 방 안에서 입김이 나온다. 파카를 입고 내복을 껴입고 전기장판에 의지한 채 시린 코만 내밀고 잠을 든다. 따뜻한 물이 나올 리가 없다. 가스레인지에 물을 데우고 아껴가며 머리를 감는다.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한다. 엄마가 혹여나 미안해할까 봐.


  자꾸 주인집 아주머니가 엄마한테 월세 밀린 걸 재촉한다. 엄마의 담배 피우는 횟수는 늘어나고, 소주병도 늘어난다.


  중학교 졸업식이다. 3학년 일 년 치 학비가 밀렸다. 내일이 졸업식인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신다. 30만 원 정도였다. 내일까지 학비가 납부가 안되면, 졸업장이 나오지 않는단다. 그럼 고등학교도 못 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엄마에게 일주일 전 학비 이야기를 했으니 말은 못 하고 기다린다. 졸업식 가는 날 아침까지도 그 돈은 못 받았다. 졸업식을 하고 있는데, 멀리 엄마가 온다. 해결했다. 나는 그 조마조마했던 중학교 졸업식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 나약한 내 존재가 싫었다. 철 없던 그 딸은 졸업식이 끝나고 엄마가 쥐어준 용돈으로 친구들이랑 신나게 그 날을 즐겼다.


  엄마가 고등학교 기숙사를 가라고 한다. 당장 너와 내가 같이 살 곳이 없으니, 기숙사 신청을 권한다. 다행이 내가 다닌 그 특성화고는 성적이 조금 높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학비도 기숙사비도 면제다. 오히려 농협상품권까지 받아가면서 장학금까지 받았다. 중학교 담임에 추천으로 온 이 학교는 작은 희망이 되었다. 엄마는 배내골 깊은 산골 숙식제공이 되는 식당으로 일을 갔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엄마가 일하는 식당으로 놀러 갔다. 무거운 쟁반을 들고 나르는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숙사가 완료되기 전, 잠깐 아빠와 있었다. 아빠는 마산에서 일을 하며, 여인숙이란 곳에 달방을 얻어 있었다.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아빠에게 가야지. 학교는 부산인데, 한 달 정도 시외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아빠와 그 여인숙 달방에서 같이 자고, 아빠가 새벽에 일을 가고 나는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빠는 작은 가스버너에 의지한 채 딸내미에게 줄 저녁상을 위해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인데 말이다. 그 다 큰 딸 밥을 먹일 거라고 했던 아빠를 생각하면 먹먹하다. 자신에 무능력을 그 밥으로 대신하려고 했을까? 아빠가 해준 그 밥은 너무 맛있었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너무 생생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태연한 척하는 내 행동이 아빠에게는 안쓰러웠을 거다.


  졸업이 가까워진다. 엄마가 같이 살 집이 구해졌다고 한다. 작은 주공아파트로 보증금을 모으셨다. 그 국민임대 아파트는 천국이었다. 엄마가 주는 밥을 먹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니깐 자꾸 아빠가 생각난다. 엄마에게 아빠를 데려오자고 말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서류 도장을 찍은 지 4년이 지난 지금 딸에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게 아빠와 엄마는 재회했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나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공부를 하지 않는 친구들 사이 그래도 성적관리를 해서 그런지, 전 과목 내신등급은 1등급이다. 특성화전형으로 어디든 대학은 갈 수 있다. 여기저기 지원해서 합격받은 곳도 다양하다. 지원서 내면서 등록금 낼 돈이 없어 못 갈 거라는 것 알면서도 지원서를 냈다. 확인하고 싶었다.


  23살, 조금 늦은 나이에 작업치료과에 갔다. 간호학과도 아닌, 물리치료도 아닌, 치위생도 아닌, 진짜 생뚱맞은 학과로 입학까지 했고, 그 이후 모두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 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첫 등륵금은 그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냈다. 졸업을 하고, 아빠와 엄마에게 조금 벗어나 독립하고 싶었다. 금방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드디어 성인으로 떳떳하게 취업까지 해서 내 힘으로 먹고 살아갈 최대치 레벨까지 왔다.


  이게 뭐라고 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지난 과거일 수도 있다. 내가 애 늙은이처럼,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차분해질 수 있는 게 어릴 때 겪은 가난 때문인가 싶을 때도 많다. 겪어보지 못하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대부분에 국민 반이 못살던 때가 아닌, 어느 정도 산다고 하는 그 시절 내가 겪은 그 가난의 자국은 지독하다. 아직 못다 한 가난의 자국은 남아있다. 서두르지 말자.


  그래서 그런지, 나는 좋아하는 말이 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 살인을 저지르고 약자를 학대하는 그런 상황을 빼고는 그럴 수도 있지로 해석하는 일이 자꾸 많아진다.

 

  내가 겪은 그 가난의 경험이 자꾸 외친다. 그럴 수도 있잖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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