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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감성 Dec 31. 2023

이대로 보내기엔 아쉬워서

안녕, 내 2023년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이 다가왔다. 새해의 다짐만큼이나 공허한 12월의 마지막 날, 이 날을 얼른 보내버리고만 싶지만 이대로 보내기엔 아쉬워서. 정말 이대로 보냈다가는 그저 그런 한 해로 남을 것만 같아서. 오늘로부터 가장 먼 날부터 짚어보기로 한다.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지난 3월에 숨을 거둔 류이치 사카모토의 작품들을 들으며.



1월

#10월 퇴사 후 12월, 여행을 다녀왔다. 1월은 모든 게 마무리되고 맞은 첫 달.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친한 동생의 청첩장. 축하한다,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야~ 초조해지게. 나? 나는 뭐... 그게 뭐 내 마음대로 되나.


#그녀가 새로이 데려온 강아지를 만났다. 반가워. 얘 왜 이렇게 내 눈치를 봐? 그 아이 학대받았던 아이야. 아, 그래? 쿵이야, 오늘부터 네가 만난 주인은 정말 착한 사람이야. 앞으로 눈치 보지 말고 듬뿍 사랑받아.


#두 퇴사자의 만남. PD님은 앞으로 뭐 하실 거예요? 예전부터 상담받던 선생님이 있는데 그분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보려고요. 멋져요. PD님은 잘하실 거예요.



2월

#추운 날, 어린 시절 한 동네 살던 친구들과 모였다. 호주는 좋냐? 힘들어, 그래도 좋지 뭐. 얘는 이제 유부남이야. 아 정말? 참 신기하네. 시간 정말 빠르다.


#취업을 하려면 영어 성적 하나쯤은 필요하단다. 부랴부랴 시험을 신청하고, 나름 공부도 해본다. 여행 다니기 전에 해볼 걸, 은근히 도움이 되네.


#교회를 떠난 동생과 커피 한 잔. 다른 교회는 어때? 사람들이 친절하고 좋아요. 우리 교회 사람들이랑은 잘 연락하고? 네, 여전히 친하니깐요. 그래,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고.



3월

#여행을 좋아하면 여행 다니며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항공, 여행사, 스타트업. 이 쪽도 관심을 가져봐야겠다.


#항공사 경력직 면접이 잡혔다. 내가 일한 시간들이 하나의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구나. 취업, 생각보다 어렵지 않구나?


#면접날, 동생이 입던 정장을 입고. 아, 질문엔 의도가 있고 의도엔 정답이 있구나. 내가 너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왔네.



4월

#쿵이야, 벚꽃이 참 좋지? 네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참 좋다.


#운전면허증을 재발급받으라는 알림이 왔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구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달라진 것 하나 없는 것 같은데.


#전주국제영화제 참석. 신인 감독들의 독립 영화를 보며, 나도 어릴 적 꾸던 영화의 꿈을 계속 키워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 예술의 영역을 넘보지 못하고 힐끔거리는 내게 그들의 작품은 존경과 질투의 대상.



5월

#데이터, AI시대엔 코딩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대. 그래? 나 그런 거엔 쥐약인데.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SQLD자격증 신청. 아니 그보다 컴활부터. 하, 정말 나랑 안 맞는다.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 너 휴가 나왔을 때 안절부절못하면서 그 친구한테 전화하던 거 생각난다. 지금 그 친구가 진짜 신부가 될 줄은. 정말 축하해, 식장도 너무 예쁘다. 그리고 너도 고생 많았어. 앞으로 좋은 날만 있기를.


#생일 축하해 줘서 고마워. 나도 내 생일에 큰 감흥이 없는데, 덕분에 정말 행복해. 너 아니었으면 지금 이 시기, 많이 외로웠을 거야. 함께 해줘서 늘 고마워. 내게 없는 부분을 채워줘서, 너로서 오늘 하루가 가득해.



6월

#SQLD 자격증 검정 시험장.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시험을 공부하고 있다고?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이제야 내딛는 나는 무언가 뒤처지는 것 같아.


#엄마 아빠, 나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보고 싶어요. 미국에서 들었던 그 넘버,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플루트 솔로를 맡았던 그 부분, 힘들 때 들었던 그 음악.


#여행사 서류 통과. 다음은 면접. 엄마의 한 마디. 여행사는 힘든 거야 감성아. 그래도 여행을 좋아하면 괜찮지 않을까? 여행은 취미로 남겨두고 다른 일 해보는 거 어때? 나는 엄마말을 들었던 걸까, 이전 항공사 면접을 망쳐 무서웠던 걸까. 면접은 보지 않기로 했다.



7월

#친한 동생의 결혼식. 축하해! 진짜 가는구나. 어때, 실감이 안 나지? 그러게. 잘 가고, 다시 한번 축하한다.


#친할아버지의 기일,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 감성은 요즘 뭐 하니? 형 요즘 유튜브 해요! 그래? 어디 한 번 틀어봐라. TV속 여행하는 내 모습, 그걸 지켜보는 가족들. 많이 부끄럽네요. 큰 아빠가 자주 본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엄마와의 산책. 노을이 지는 거리. 엄마 무지개가 진짜 예쁘게 생겼네. 그러게.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은 붉게 물들고, 오랜만에 본 하늘은 정말 예뻤어.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보기로 했다.



8월

#대학교 후배들이 준비한 홈커밍에 갔다. 1기로 시작한 학회에서 벌써 홈커밍이라니. 미안하다, 선배가 돼서 찬조 한 번 못했네. 그런 생각을 하니 딱히 다른 할 말을 하지도 못했다.


#교회 청년부 수련회. 형이 여기서 제일 나이 많아요! 정말? 정말 그렇네. 형 누나들은 다 어디 갔지. 에이, 내가 그런데를 왜 가, 라고 말했던 형들이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가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만 함께 하기 눈치 보이는 나이.


#결국 다시 떠난다. 시드니로, 멜버른으로, 브리즈번으로. 그리고 오래된 친구를 보러. 맨날 보러 간다, 보러 간다 하는 친구들 많았지만, 이렇게 직접 가는 친구... 나밖에 없지?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9월

#호주에 사는 친구는 인스타그램에서 멋진 사진들을 올렸어요. 대자연, 멋진 음식, 좋은 사람들. 참 살기 좋아보았어요. 시드니를 여행하는 지금, 많은 이민자들이 보여요. 그래, 많이 힘들었겠구나. 눈치도 많이 봤겠구나. 감추고 싶은 슬픔도 있었겠구나. 보고 싶었다, 친구야.


#호주 여행 끝 다시 도착한 동남아. 한국에서 이직 전 여행을 떠나고 싶다던 친구와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만났다. 이직 어렵다더니 축하한다! 에이 뭘, 이제 다시 시작이지.


#앙코르와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벽 사이로 파고든 거대한 나무의 뿌리와 이끼로 뒤덮인 기둥을 보며 거대한 '시간'을 보았다. 그래, 내 단단한 벽도 저렇게 작을 줄만 알았던 뿌리에 갈라지겠구나, 내가 남긴 기둥도 언젠가 이끼로 뒤덮이겠구나. 그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이곳에 남길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감성아,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10월

#뜨거운 여름날, 수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너와 화려하게 쏟아지는 불꽃을 봤다. 불꽃이 터질 때마다 우리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그때마다 환하게 웃는 네 모습이 정말 좋았어.


#오랜만에 정기 검진. 이제는 반년이 아니라 1년마다 와도 되겠는데? 정말요? 병원을 나서며 잔잔한 감동과 함께, 한편으로는 섭섭함도 느꼈다. 삶이 가장 생동하던 시기는 죽음과 맞닿아있던 때라는 걸, 그걸 잊고 싶지 않아도 반복되는 시간 속에 그 소중함을 잊고 말아요.


#대기업 C사 서류 통과. 그저 1차일 뿐인데, 이미 그 회사에 들어간 나를 상상해 본다. 낯부끄러운 상상. 하지만 면접을 준비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11월

#면접을 준비한다고 스터디도 하고 레퍼런스가 될 만한 공간도 방문해 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지난 면접 때의 실패를 생각하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말자는 생각. 어떤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때에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면접날, 모든 게 좋았지만 딱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 내가 아팠던 이야기를 꺼낸 것. 다시 아플 일은 없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아, 왜 그 이야기를 꺼냈을까. 아니야, 다른 대답은 누구보다 잘 대답했잖아. 만약 그런 걸로 떨어진다면, 애초에 그런 회사는 갈 필요 없어. 위로해 보지만 잘한 것 9가지보다 1가지 실수만 마음에 남는걸요.


#안 기다리는 척해보았지만 문자만 기다렸다. 결국 예상된 시간에 결과는 나왔고, 확인한 순간, 아, 탄식. 정말 그게 잘못이었을까? 대답을 너무 길게 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도 알 수 없지.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해 봐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준비한 만큼 떨어지는 느낌이어서, 자존감이 깎인다.



12월

#벌써 12월이라니, 시간 정말 빠르다. 통장 잔고도 지난 회사 입사 전으로 돌아간 상황. 통장 잔고뿐만일까. 일했던 경험들도 희미해지는 시간, 나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여유롭던 마음도 올해가 끝이겠다. 올 해에는 힘든 결정을 내렸지만 내년에는 선택권마저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연말을 맞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이렇게 다 모이는 것도 기적이네. 철없던 시절 쳤던 장난들은 지금 생각해 봐도 여전히 웃겨. 실없는 소리로 웃다가 헤어진다. 근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웃음이 가볍지가 않다.


#새로운 한 해 목표? 글쎄. 거창한 목표를 세우기에 부담스러운 나이지 않을까? 그래도 여전히 가슴 한 편에 간직한 꿈이 있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그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꿈. 내 뜻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도 예비된 길이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그저 나는 기도하고 바라며 실천할 수밖에 없다.


12월 31일 오늘.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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