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l Nov 29. 2020

병 1개를 더 획득하였습니다

7번 신경마비 벨마비 안면마비 구안와사. 이름도 많아요. 아무튼 재발

처음에는 초월적 존재에서 이유를 찾았다. 종교가 없지만 괜히 온갖 신을 소환하고, 하늘이시여 내게 왜 이런 시련을 따위의 원망을 토해냈다. 하늘 탓이 끝나면 남 탓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은 죄다 원망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더 가까워진 이유들은 수두룩하게 쌓인다. 휘몰아치던 스케줄, 지난밤 맞은 찬 바람, 내가 딴 술병들 그리고 날 힘들게 한 사람들.


하나씩 미워하다 보면 좀 나아질까 싶지만 미워하는 게 많아질수록 힘들어진다. 불변의 법칙이지 뭐. 미워하는 일처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도 없고, 그것들 속에서 점점 내가 보인다. 그토록 쉼 없이 스케줄을 잡은 사람도, 세찬 바람이 불어도 굳이 돌아다니던 사람도, 매일 술병을 딴 사람도 나였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했다. 이 병의 시작은, 미움의 끝은 결국 나 자신이 됐다.


이전 글 

1) 초기 증상(https://brunch.co.kr/@chal/24​​) 2) 호전 경과(https://brunch.co.kr/@chal/25​)


구안와사 재발 4주 차. 보름에 뜬 초승달이 조금은 더 커졌다. 왼쪽 윗니도 이제 4개나 보인다. 다섯 번째 치아가 보일랑 말랑 하는데, 여전히 턱의 왼쪽 호두는 흐릿하게조차 생기지 않는다. 입꼬리 근육이 많이 풀렸을 뿐, 여전히 뺨 근육이 부동이다. 이마 근육도 얼추 돌아왔다. 이미 11년 전에 남은 후유증으로 왼쪽 이마는 오른쪽 이마에 비해 덜 올라갔었다. 이전의 얼굴이 점점 기억에서 사라진다. 내가 원래 어떻게 생겼더라. 웃으면 제법 이전과 비슷한 얼굴이 나오는 것 같다. 말하지 않으면 지인도 못 알아보긴 할 정도지만, 왼쪽 눈 밑 아래가 바들바들 떨린다. 애써 웃는 사람처럼.


애써 웃는 게 맞다 사실. 한 달 동안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이번 투병 과정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던 일들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던 것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됐다. 가장 먼저,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것. 행복했던 시절에는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막상 웃을 수 없는 얼굴이 되고 방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웃을 일이 없다. 이전에는 배꼽 잡고 웃었던 드라마나 영화도, 유튜브도 전혀 웃기지 않는다. 웃으면 얼굴이 찌그러진다는 생각에 웃음을 참다 보니 이젠 웃을 수가 없게 됐다. 지금은 억지로라도 웃는다. 억지로라도 웃어야 내 마음도 웃으니까. 애써 웃는 내 모습이 애처롭지만, 마음이 못 웃으니 별 수 없지.


첫 일주일 동안은 집 밖을 안 나갔다. 나가도 혼자. 제일 친한 친구 한 명만 만났다. 친구를 만나도 웃을 순 없었다. 오히려 울었지. 솔직히 제일 친한 친구를 만난 이유는 하나다.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오르는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놔야 했다. 결코 그 모습이 예쁘고 멋있을 리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아무리 못난 모습을 보여도 있는 그대로 감싸줄 수 있는 친구니까- 또 부정적인 기운이 갖는 그 막강한 전염성을 뻔히 알면서도 만났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첫 주에는 다른 사람 입장을 생각할 정도의 심리적 여유가 없다. 원래 그 정도로 착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감정선이 널뛰는데 누굴 챙기겠나. 그래도 고마워 친구야.


2주 차부터는 다른 친구도 만났다. 체력도 조금씩 돌아왔고, 원래 밖순이인 내가 참을 대로 참았던 탓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고 싶었다. 진심으로. 웃기 위해서 몸이 힘들어도 약속을 잡았다. 얼굴은 안 웃어지지만 마음만이라도 웃어야 하니까. 시답잖은 농을 주고받는 시간을 아까워했던 내가 이제는 구태여 찾아 나선다. 병이 뭐라고.. 입꼬리 근육이 풀린 3주 차 이후부터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친구를 만나러 조금 멀리도 가보고 카페에 앉아 수다도 떨었다. 그래도 재발 이전의 나처럼 지내도 돌아오지 않는 게 있었다. 내 마음.


마음은 5주 차가 넘은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는다. 앞선 글대로 마음 근육은 안면마비 이전에도, 이후에도 마비됐다. 글쎄 마비된 건지 녹아내린 건지 어느 게 적절한 표현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냥 마음이 무너졌다. 그동안 신체와 정신 건강 모두를 지탱하던 근육들이 사라져 둘 다 망가져 버렸다. 어느 게 먼저인지, 그리고 그 둘이 진짜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시간순으로 나열해보면 마음-몸(얼굴)-마음 순으로 엉망이 됐다. 여태 공들여 치료한 건 몸인 게 아이러니지만.


원인이 명확하지 않아 구안와사를 몹쓸 병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걸 알아야 해결을 할 테니! 그런데 우울증도 똑같다. 아니 더 몹쓸 병이다. 아주 더 고약하고 못됐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를 모르겠다. 구안와사의 원인은 객관식으로 선택지라도 주어져 추리는 할 수 있는데.. 이건 하늘부터 나까지 오는 우울증 이유 찾아 삼만리에서 병이 나아지는 게 아니라 되려 악화됐다. 무언가를 탓하려 하는 그 순간부터 행복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게 나 가 된 순간, 스스로를 지우며 우울은 점점 깊어만 갔다.


원인 찾기에 실패했지만 우울의 그림자가 너무 가까이 드리웠기에, 해결부터 하기로 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지만 그래 일단은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원래의 행복했던 나와 가장 유사한 모습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다. 애써 웃는 것도 그중 하나일 뿐.


이게 맞는 걸까 스스로를 또 의심하다 보면 결국, 원래의 내가 진정 행복했는지 까지 의심하게 된다. 다시 내가 과거의 나를 부정하게 되는..그 굴레에 빠져버린다. 그렇게 오늘도 우울 속에서 허우적댄다. 이제는 내 얼굴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볼 때인 것 같다. 구안와사 투병기가 우울증 투병기로 바뀌는..그런 느낌적인 느낌... 현실이다. 이렇게 이겨내야 하는 병 하나가 늘었다. 그래 이겨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름이 되니 초승달이 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