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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Sep 19. 2019

하루키는 존재에 대해서 쓴다2

당신이 몰랐던 하루키에 대하여


4. Scheherazade


    '세헤라자데'는 6개의 단편소설 중 인간의 육체적인 관계가 전달하는 존재의 충족성을 가장 깊게 주목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외부 출입을 하지 않은 채 국가 보조를 받는 남성에게 기본적인 생필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여성이 전하는 육체적 관계와 정신적인 교류 등을 통해서, 비록 역할극에 불과할지언정, 타인과의 연결이 주는 의미에 대한 고찰한다. 


    하바라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방에 출입하여 생계를 유지시키는 여성을 '세헤라자데'라고 부른다. 그녀가 섹스가 끝난 뒤에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이다. 하바라는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에 대한 감각을 익힌다. 그녀의 이야니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이고, 동시에 '충족된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갈망'을 담았다. 두 사람의 섹스가 어딘 지 모르게 불편한 것은 '섹스에 응당 필요한 것'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바로, 욕망이다.  



    세헤라제데는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들키지 않되 그 어느 때보다 집중된 형태의 욕망을 구현한다. 도대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왜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여근처럼 주변의 분위기를 흡입하고, 이야기로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게 만든다. 마치 그녀가 전생에 살았노라고 주장하는 '칠성장어'처럼 말이다. 

    

Scheherazade 가 전생에 자신이었다고 주장하는 칠성장어.


    다른 장어들과 달리 턱이 없는 칠성장어는 바닷속 수풀속에 은신한 채 먹잇감을 기다린다. 칠성장어는 오직 '칠성장어같은 생각'에 골몰한채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 존재 방식에 집중한다. 언뜻 남들이 봤을땐 수동적으로 물살에 흔들리는 풀처럼 보일지언정 그것은 적어도 사냥을 하고 있다. 세헤라자데가 고등학생 때 좋아하는 남자애의 집에 몰래 침범해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왔다는 일화는 이와 같은 그녀의 실존 방식을 보다 공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국가의 보조를 받으며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하바라에게 그녀의 삶의 방식은 매혹적이고, 기가 막히고, 믿을 수 없다. -하루키의 단편 소설은 두가지 중에 하나로 분류된다. 화자가 과거에 대한 이야기로 서사를 시작하는가, 혹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가.- 하루키가 전생이나 후생, 혹은 현생에 '비인간'을 예로 드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6화의 [사랑에 빠진 잠자]에서 잠자가 끊임없이 인간이 아니라 해바라기나, 물고기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를 고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만큼 하루키에게, 그가 그리는 화자에게, '실존'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힘겹게 진 그 무언가다.


    마침내 세헤라자데가 다음의 이야기를 약속하고 떠났을때, 하바라는 침대 속에서 '홀로 남게 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본다. 과연 내가 타인없이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암울하고, 지독하고, 인간의 정신을 망가뜨릴만큼 절망적인 고민은 어쩌면 그가 폐쇄된 삶의 방식을 벗게 해줄 욕망의 촉발을 일으킬 지 모른다. 그가 세상의 밖으로 나가서 치열하게 부딪힐 준비가 됐다는 신호일 지도 모른다. 그 옛날, 세헤라자데가 왕에게 일러줬던 단 하나의 교훈처럼 말이다. 바로, 당신은 혼자 살 수 없다는 점이다.





 5.KINO


   "What a wonderful place," she said. "Quiet, clean, and calm -very you."

... But there's nothing here that really moves you.


"멋있는 장소네," 그녀는 말했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침착하고... 그냥 너같다."

... 하지만 이곳에는 널 감동시킬 만한 게 아무것도 없겠지. 


    다른 작품에 비해서 키노는 독특하다. 우선,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고, 서사의 시작부터 초점을 받게 되는 인물은 따로 있는 데도 불구하고 독자의 시선은 자꾸만 화자인 '키노'로 향한다. 단순히 소설의 제목이 '키노'여서만은 아니다. 진심을 다해서 노력했던 운동에 좌절한 후, 어떻게 자리를 잡은 소규모의 스포츠 운동화 판매업에서 키노는 '그저 그런 삶'을 사는데 익숙해진다. 그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와중에 아내와 친한 친구가 섹스를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키노'라는 바를 운영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키노가 비교적 남의 이야기처럼 풀어내는 서사에는 불편한 결여가 잠들어 있다. 이것은 무언가 결여된 화자가 자기 존재를 반성하는 이야기다. 


    키노의 주인공은 여타 하루키의 작품세계에 등장하는 화자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침착하고, 맡은 바 일을 확실하게 해내되, 필요하지 않다면 나서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는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일 그가 다른 화자와 결이 다르다면, 그 점이다. 키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나치게 충격적인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어쩌면 그는 현실을 마주보는 기능을 상실한 것일 지도 모른다. 어딘가 '마취'에 취한 것처럼 그는 섹스를 대한다. 그는 갈망하지 않되 욕구에 충실하다. 그의 인생은 그가 바를 운영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는 화려하게 가게를 포장하지 않고, 남에게 가게를 열렸다는 것을 알리지도 않고, 그저 아오야마의 구석에서 타인이 나를 발견해주길 기다린다. 아마도 그것이 '신'에 가까운 존재, 카미타가 그의 바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을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결여된 존재만큼 같이 있기 편한 사람도 없다.  


    마지막에 키노가 카미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폭포가 터지듯 제 심정을 글로 적어 세계와 나를 가장 가깝게 잇는 이모에게 보낸 뒤, 홀로 잠들기 전 방안에서 '실은 상처를 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은 뒤늦게 이는 파도처럼 인간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실은 나는 아내의 외도에서 상처를 받았음을, 그리고 끊임없이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카미타가 충고한 대로 현실로부터 떠난 화자가 뒤늦게 제 기억을 마주보고 과거의 현실을 인정하게 되는 장면이다. 어떻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키노에겐 여전히 할 일이 많다. 카미타의 경고를 무시한 그는 어떻게 될까? 과연, 그마저도 카미타가 설계한 계획의 일부일까? 알 수 없다. 이 세상을 차갑게 물들이는 빗소리와 함께 소설은 이미 끝나고 말았다.




6. 사랑에 빠진 잠자 Samsa in Love   



    No argument, no message. It fulfilled its structural role but aspired to nothing further. 

    어떤 종류의 논증도, 교훈도 없었다. 그저 어디로도 통할 수 없을 뿐인 구조적인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사랑에 빠진 잠자'는 하루키가 열렬하게 소설에 등장시킨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의 역발상에서 시작한다. 만일 거미가 '그레고리 잠자'라는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고작 역발상에 불과한 것은 대개 깊이가 얕다. 언젠가 한 출판사가 장르문학을 철저하게 사장시킨 주제에 미국에선 소설책 한 권 팔지도 못하는 이를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랍시고 포장을 거듭해서 몇백만권 팔아제낀 후에 그 사람처럼 소설을 쓰라며 공모전을 열었고, 그 출판사는 머리를 잘 굴려 똑같이 생긴 표지에 색깔만 다르게 해서 소비자를 기만하듯 판 전적이 있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출판사가 판매하는 어떤 책도 구매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말도 안되는 "공상과학" 작품 중에 이렇게 역발상을 다루는 게 몇 개 있었다. 그 당시 심사위원들은 단순히 깊이가 없는 채,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는 역발상에 불과한 것은 우승 자격이 없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진 잠자]를 읽으면서 그 심사위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만일 정확히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반대로 뒤집고 싶을땐,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사랑에 빠진 잠자]는 비인간이 잠에서 깨자 스스로 인간임을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수많은 예술가가 '인간임'을 새삼스레 조명했던 것에 '패러디'라는 위트를 더한다. 더 나아가, 하루키는 이와 같은 시도를 통해서 인간 본연의 실존방식에 대해서 재고찰을 이끌어낸다. 



    What, or who, lay beyond them? He longed to open them and find out. Perhaps then he might begin to understand the mysterious circumsatances in which he found himself.

    무엇이, 누가 그 너머에 있단 말인가? 그는 너무나 그 문들을 열고 확인하고 싶었다. 아마도 그렇게 한 뒤에야 그는 자신이 처한 이 불가해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간소화되고, 간략해지고, 간단해진 시대에 인간관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세상은 스마트폰 어플만 있다면 간단하게 섹스를 할 수 있고, 배달을 시킬 수 있고,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을 중심으로 갖는 면대면의 '인간관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실존 방식이다. 일련의 단편소설로 하루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낡은 것을 상실한 시대, 자신마저 잃어버린 인간'에 대해서 성찰한다. 그레고리 잠자가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발견하기 무섭게 허기로 촉발된 모험을 시작하는 방식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 인간을 닮았다. 끊임없이 존재 방식에 대해서 질문하는 화자는 대단한 철학자처럼 존재 본연의 본질에 닿지 못하되, '왜?', '나는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대중의 철학을 담는다. 그러나 그마저도 최근의 인류는 성취하는데 실패했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간절하게 알고싶어하는 인간은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삶을 살아간다. 그곳에는 무언가 결여된 상태로 사는 인간이 있다. 바로, '인간성'이다. 



    Why must I undertake something this perilous and unnatural? It makes no sense -there is no rhyme or reason to it.

    왜 나는 이렇게 위험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을 해야하는가?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박자나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레고리 잠자가 허기를 채우기 무섭게 등이 굽은 여자가 찾아온다. 그녀의 직업은 '열쇠공 견습생'이다. -이곳에서 하루키 특유의 '그럴 수도 있고' 식의 메타포를 읽을 수 없다면, 당신은 충분히 그를 읽지 않았다.- 열쇠공 견습생인 여자는 잠자에게 다양한 것을 일러준다. 프라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여자들은 브래지어를 찬다는 점, 변태들은 등이 굽은 여성과 섹스를 하고 싶어한다는 점등. 그러나 그녀가 일러준 것중 잠자의 무언가를 일깨운 것은 '사랑'이었다. 하루키가 발기로 표현하는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육체적 끌림을 통한 존재의 충족이다. 타인과 연결되는 것을 갈망하는 순간, 이 세계를 발견하고 싶다는 본능에 인간은 휩쌓인다. 바로 거기서 인간은 '나'의 존재에 대한 감각을 깨닫고, 세계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시발, 망할 철학과 나와서 이딴 거 쓰고 앉았네.- 한편, 나의 존재에 대한 감각이 타인에 대한 발견을 통해서 '결여된 바 없이' 충만해지면서, 나는 내가 마주보는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내적인 고독의 혼란은 타인을 발견하는 것을 통해서, 존재의 또 다른 이면을 마주보면서 극복을 이룬다. 마치 등이 굽은 여성의 움직임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싶은 충동처럼 그것은 세계와 연결되고 싶은 욕망, 나를 알고 싶은 욕구,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은 기대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나는 타인을 통해서 나에게 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의 실마리를 얻고, 그로 인해 보다 비현실적인 방향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바깥에선 전쟁이 벌어져도, 안에선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있는가, 를 고민하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박한 번식 욕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일인성을 극복하고 싶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착각에 빠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탐구하지 않고, 탐험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열정을 잃은 채 부유하는 삶속에서 하루키는 비인간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레고리 잠자는, 그 어느 존재보다 실존이 낯선 생명체는 허기에 의해서 움직이고 호기심에 촉발된 채 냄새를 따라서 살아간다. [사랑에 빠진 잠자]는 그러므로 실존을 마주친 인간이 인간성을 품은채 비인간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불가해한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다. 아무것도 더는 들여다볼 수 없는 천장의 누리끼리한 색깔같은 세계를 발견했던 잠자는 등이 굽은 여성을 통해서 이 세계에 배울 게 많다는 점을 깨닫는다. 'The world was waiting for him to learn. 이 세계는 그로 하여금 세계를 배우길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번역가가 틀리지 않았더라면, 주어는 '세계'다. 이 문장에서 독자는 막 실존의 상태를 발견한 잠자가 일인성의 한계를 너어서 세계와 연결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내의 존재로서 자기를 파악한 감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 바깥으로 '나'를 투영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할 만한) 타인'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내력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제 아무리 어둡고, 음습하고, 쓸쓸한 실존이 계속 될 지라도 존재를 버텨야 한다. 이렇게 무가치한 인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는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하며, 그곳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마치, 허기를 따라가서 음식을 삼키는 방식으로 존재의 현실적인 측면을 이해하고, 문을 열었을 뿐인데 살의 선을 넘어서서 세계와 내가 연결된 것을 알게 하는 '타인'의 존재를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흔히,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를 두고 '나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을 내것으로 만들고, 내가 타인의 것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세계 속의 자아 감각을 발견해서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실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얼마나 그것이 일시적일지 몰라도 말이다. -아마도 그것이 이 소설이 '사랑에 빠진 순간'만 보여주고 단편에서 끝나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 즉,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를 발견하게 될 날이 언제올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름 그대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세계의 작은 구석에서 기묘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피어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7. 여자 없는 남자들 Men without Women 




    Whenver that west wind blows, M will surely be found.

    That's M to me. 

    어디서 서쪽 바람이 불어오건, M 은 분명히 발견될 것이다.

    그게, 나에게 M이 가진 의미였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가장 성공적이고, 실패한 작품이다. 하루키는 7편의 단편 중에서 유일하게 이 작품에서 여성을 대할때 이니셜을 사용한다. M. 그것은 본인이 작품에서 밝혔듯이, 본질을 찾는 여정에서 그것이 얼마나 회피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지 함축한다. 앞선 작품이 '타인의 중요성', '세계 속의 나를 발견하게 만드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설파한다면, 마지막 작품은 '그래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여자란 누구인가?' 에 대해서 고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정답을 알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하루키는 정확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는 것보다 화자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루키가 상상한 게 아니라, 화자가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는 게 어울렸다.'고 밝힌 그 이야기는 현실이 가진 추악할 만큼 초라한 '사실성'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외면과 진실에 대한 숨김이 그 자체로 존재의 본질에 가닿는 통로를 여는 것이다. 영원히 이룩할 수 없을 시도일 지언정, 화자는 이니셜로 정의된 여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그녀와 자신이 연결된 지점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현실은 존재가 자아를 파악하는 세계 속의 진실이고, 이미 헤어진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하기 위해선 부단히 기억으로부터 그 진실을 파올리는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심리적 요인에 의해서 오염된 기억과 주관적인 개인의 시선의 특성상 쉽게 포착할 수 없다. 차라리 그 모든 시도를 포기한 채, 지나치게 거대한 이름인 'M'이라는 것으로 과거의 사랑을 더듬는 게 독자에게 그 표현할 수 없을만큼 복잡하고, 광대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의 본질', 혹은 '세계(속의 나)의 정의'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는 게 하루키의 판단은 아니었을까? 


    No one can keep their eyes on someone every second.

    매 초, 타인에게 집중할 순 있는 사람은 없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7편 중 가장 서사가 부족하고, 그것은 의도적이다. 환상을 핑계로 상상을 두른 채 조심스레 진실에 가닿기 위해서 노력하는 하루키의 노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 혹은 쪄죽을 것 같은 사막을 홀로 걷는 사내의 신중한 발걸음을 보는 것 같다. 마치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가 뒤늦은 변명을 하는 것만 같은 이 소설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물음표의 울림을 갖는다. 과연 그가 우리에게 'M'을 통해서 하고싶은 말은 무엇일까?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약속했던 '완벽한 보살핌'에 대해서 또 다른 하루키의 작품세계 속 화자가 '인간은 생활을 해야만 해.' 라고 답변하는 것만 같은 내적 혼란이 이곳에 있다. 타인의 존재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불합리할만큼 가혹한 그 진실은 '사랑'이 갖는 단편성에 마지막 단편은 결론을 내리듯 주목한다. 화자가 만났던 여자들은 타인을 통해서 그 존재의 충족함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들이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화자가 없는 곳에서 삶을 끝낸 이유였을 것이다. 그녀들의 남편은 바둑의 심판이 결과를 알리듯 무덤덤한 어투로 그에게 결론을 전달할 뿐이다. 당신은 제 시간에 본질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삶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 진실이 돌벽처럼 단단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본질은 회피하는(evasive) 신기루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 차이를 하루키의 소설은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나 본질을 앗아가는 존재, '화자로부터 여성을 빼앗는 그 이름모를 선원'이 존재한다. 어디로 가건, 실존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을 실패하게 만드는 그 가상의 진실말이다. 







    Suddenly one day you become Men without Women.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들이 없는 남자들이 된다. 



    가장 먼저, 일련의 작품을 '존재에 대한 발견의 과정'을 서술하듯 순차적으로 정렬할때 편집자의 심정을 느끼면서, 나는 글을 음미했다. 그, 기대에 가득 차고, 설레고, 두근거리고, 문학을 하는 내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 같은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독립적이라고 볼 수 있을만큼 동떨어진 삶의 파편에 대한 조명에서 드러나는 실존의 보편성을 통해서 하루키의 작품 세계가 지닌 철학을 다시금 되새겼다. 하루키는 작가 지망생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다. 이렇게 자세하고, 열렬한 방식으로, 상상에 환상을 덧씌어가며, '인간의 실존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 생명체가 존재의 방식을 피상적인 차원에서 깨닫고, 보다 깊은 곳의 이면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서 재해석한 작품을 만나게 되서 진심으로 기쁘다.


    동시에 일본 사회의 특수성에서 발견한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실존 조건을 현실적인 차원에서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서 구현하는 작가가 있다는데 진심으로 일본이 부러웠다. 나는 고립된 환경에서 소수의 작가가 독차지한 장르 문학 위주의 일본 출판계에 크나큰 기대를 가진 적이 없으나, 나쓰메 소세키와 무라카미 하루키등 문학을 읽으면 진심으로 질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은 대단히 일본적이고, 동시에 인간적이다. 국가성을 통해서 실존의 보편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루키가 선택한 것은 '그만의 창의력'이었다. 차라리 이런 것이 문학이라면 나는 부끄러워 공기 번데기라도 만들어서 숨고 싶은 지경이었다. [Men without Womne] 을 읽는 내내, 나는 하루키라는 존재를 단순히 반복된 소재만 사용할 줄 아는 작가로 이해한 데 송구스러웠다. 단순히 거기에는 초콜렛 상자처럼 내가 싫어하는 작품이 섞여있었거나, 혹은 하루키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 동일하게 펼쳐지는 화자의 스펙트럼을 신중하게 넓히는 동시에 그는 '똑같은 인간의 시선'으로 수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철학적인 문학가의 시도였다. 아무튼, 세잔이 사과를 수없이 그릴때 그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자가 없는 남자들]은 반대편을 상실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마주보는 벽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나는 나로서 현실을 충족한 채 살 수 있는가? 부족하지 않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인간은 섬으로 살 수 없다. 섬은, 육지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바다를 떠돌다가, 이곳에는 나와 같은 존재가 많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내가 바다를 흘러가는 방식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오만에 불과했다는 것을 하루키는 '혼자가 아니야'를 주문처럼 외친다. 그러나 두 개의 섬이 영원히 한 가지의 육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그 불가능성을 뛰어넘고, 스스로의 실존을 극복해나가는 보편적 과정을 하루키는 각자 다른 세계에서 거의 동일한 나를 발견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낸다. [여자가 없는 남자들]은 서로 다른 피사체를 담은 즉석 사진을 한 줄에 순차적으로 엮어낸 글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모두가 동일한 감정선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영원히 똑같을 수 없는 진동을 전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하루키가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인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 시작하기 전과 끝난 후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유일 것이다. 실존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몸부림과 그것에 충실했던 결과, 혹은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서 고의로 존재의 결여를 외면한 결과를 하루키는 현실에 중첩된 환상을 통해서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되게 본질을 추적하기 위해서 표현한다. 하루키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현실에 없는 것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실의 부산물이 아닌 게 없다. 오늘도, 이곳의 어딘가에 본질을 외면하기 위해서 선원이 납치를 하듯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인간들과 본질을 쫓기 위해서 삶을 다해 추적하는 이들의 길고 긴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당신이 그 어느 편에 서 있든, 그것은 삶을 정확하게 관철할 준비가 된 이들만이 얻을 수 있는 보상임을, 간절하게 타인과 융합되고 싶고, 절박하게 타인을 멀리하는 일본 사회에, 그리고 전 인류에 하루키는 전하고 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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