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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Dec 09. 2022

초현상계 完

(Maybe) No Universe


“Do you really believe the moon is not there
 when you are not looking at it?”

- (Probably) Albert Einstein


최근, 물리학자 John Clauser, Alain Aspect 그리고 Anton Zeilinger가 John Stewart Bell의 이론을 토대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얼마나 흥미로웠던지, 그것은 2022년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천체)물리학자, 수학자, 철학자만이 아니라 매니페스테이션의 원리를 탐구해온 뉴에이져를 열광케했다. 


바로, 우주의 원리가 "생각보다" 흥미로울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다룰 이론들은 각자 반박하기 어려운 비판들에 부딪혔다. 그러나, 이 글은 [초현상계]의 관점에서 매니페스테이션의 가설을 구축하기 위하여 이론을 다루는데 집중한다는 점을 고려해주길 바란다. 


1. The university is not locally real. 


먼저, 오래된 철학적 사고실험을 떠올려보자. 과연, 빨간색은 실재할까? 실재한다, 는 것은 이미 그러한 속성을 관찰의 여부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갖고 있음, 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내가 빨간색 사과를 보지 않고 있을 때에도 사과는 빨갛다, 는 수식어를 무리없이 가질 수 있다. 반면, 빨간색은 내가 보고 있을 때만 그러한 속성을 가진 것은 아닐까? 언젠가, 아인슈타인이 친구에게 했다는 그 유명한 말처럼, 달은 내가 보고 있을 때만 그곳에 존재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아닌가? (아니라면, 어떻게?) 


최근, 양자역학의 최전선에 있는 실험은 두 가지 성질이 최소한 양립불가능한 조건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오직 관찰을 한 후에만 완전히 그러한 바로서 고정되는 등 환경에 100% 지배를 받는 물체도, 관찰 이전에 이미 그러한 바로서 100% 확립된 성질을 가진 물체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마치, 우주 전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찰하기 이전에는 알 수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도 같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뇌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발견한 것과 상호작용을 통해 '앎'이란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착각할뿐, 실은 수만가지 가능성의 갈래 중에서 어떤 것을 포착하여, 그것을 고정된 상태로 인지하여,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에 불과하다. 


이것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 1985] 로 유명한 칼 세이건(Carl Sagan)의 후계자인 또 다른 천체 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 (Neil deGrasse Tyson)의 가설과 그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그는 우리가 컴퓨터의 시뮬레이션 환경에 살고 있지 않음, 을 반박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입증하면서 어쩌면 보다 더 강력한 기계의 기억 속에 모방된 현실의 일부에 불과한 뭔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현실로 인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컴퓨터로 구현된 가상현실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상현실을 기록한 메모리칩의 오래된 부분 속의 몇 장면을 점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묘한 죠죠의 모험 시즌 5에 등장한 특이점 이후 우주처럼, 그 장면은 "무한히 반복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즉, 우주는 '알 수 없는 수식'으로 만들어진 시뮬레이션 환경에 불과하다는 전제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는 현실의 실재성을 허용한다. 그러므로 현실을 사는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무한한 가능성의 갈래 중에서 의도를 갖고 인지의 방향을 결정하여, 당장의 이곳을 정복한 물리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얼마든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만일 장자의 나비이론에서 내가 나비인지, 아닌지 깨닫는다면? 매트릭스의 세계 밖으로 나온다면? 어쩌면, 플라톤의 동굴에서 나온다면 '진정한 이데아의 세계'가 펼쳐질 지 모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우주는 그렇게 쉽사리 삶의 동력을 움직일 열쇠를 허용하지 않는다.


2. 조화객관환원 이론 & 헨리 타일러


우리의 뇌는 약 1,000억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됐다. 바로 이 신경세포들이 신호를 주고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는 곳을 시냅스(Synapse)라고 한다. 만일 신경세포가 파괴되면, 시냅스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뇌만 활성화 상태라면, 시냅스는 얼마든지 새로운 신경세포와 연결될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의 뇌는 고도의 처리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인지한다. 거의 1천조개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을만큼 발달한 인간 뇌의 운용 방식도 양자역학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 결과, 우리의 영혼은 뇌의 외부에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이다.  


"Hollywood Medium" 이란 별명을 가진 헨리 타일러는 넷플릭스에서 단독 쇼를 가질만큼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매다. 그는 죽은 자를 보고, 듣고, 감각하는 등 소통할 뿐만 아니라, (당신이 물리적이란 표현을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지 몰라도) 일견 비물질적 존재로부터 인간을 향한 메세지를 받기도 한다. 그것은 에언적인 성격을 띌 때 조차도 대부분 감정적이다. 예를 들어, 죽은 어머니의 메세지를 전해주다 헨리가 화재가 나는 것을 본다. 그 날 밤, 그녀의 딸이 운영하던 가게에 큰 화재가 난다. 만일 전통적인 과학적 접근으로 감정을 이해한다면, 왜 어머니는 죽어서 어디 가지 않고, 딸에게 다시 "와서" 그녀를 위해 메세지를 전달한 것일까.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은 아닐까? (이것은 3번째에서 더욱 자세히 볼 것이다.) 


조화 객관 환원 이론은 (이하 Orch-OR)은 뉴런 사이의 시냅스를 통한 연결의 산물에 의식은 불과하다, 는 기존의 입장이 아니라, 뉴런 "내부"의 양자 수준에서 발생한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인간의 대뇌는 굉장히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기에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의식, 나아가 자의식이 발생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Orch-OR은 튜불린 단백질 소단위체로 구성된 미세소관에 집중했다. 그리고, 튜불린 전체에 π 전자가 양자얽힘이 되기에 충분히 가까워 양자 물체가 세포를 가로질러 터널링 할 수 있으므로, 뇌의 넓은 영역을 가로질러 확산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므로, 양자컴퓨터의 특성인 큐비트(Qbit)의 원리대로 미세 소관 안의 나선형 경로에서 중첩된 공명 고리를 형성하는 진동 쌍극자를 기반으로, 시/공간 분리를 수정하여 큐비트 상태 감소에 영향을 미치거나 조화시키는 가상의 프로세스를 전제했다. 한 마디로, 객관적으로 3차원에 연장된 세계를 대뇌의 시냅스 간 연결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미세소관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과정에 의해서 우리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로 고정된 세상을 인식한다, 는 뜻이다. 

 

*Quntum Bit = 양자 정보시스템에서 사용하는 최소 정보 단위로, 00, 01, 10, 11의 상태가 중첩될 수 있다. 한 qbit의 값이 00이라면, 쌍을 이루는 다른 qbit의 값은 10으로 고정되는 등 얽힘속성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을 확률의 원리로 와해하여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 양자컴퓨터의 원리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헨리 타일러 등 영매들에 의한 경험을 뒷받침할 수 있을까? 헨리 타일러는 자신이 접촉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모른다, 며 그것을 "essence(에센스)" 라고 부른다Orch-OR은 의식의 원인을 뇌에 두지 않고, 그 정체를 양자적 정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사후에 의식은 신체와 분리된 채 전통적 개념과 전혀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마치, 호머의 일리아드의 첫 문장이 세상사의 굴곡(of twist and turn...)인 것처럼 이 세상은 이미 고정된 3차원 세계가 아니라, 아주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시, 공간을 대하는 뇌가 양자컴퓨터처럼 운용되며 끊임없는 파동함수 붕괴를 통해 하나의 것으로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세상과 의식의 관계는 0과 1의 bit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Qbit를 전제로 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게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한 방향으로 고정하는 것이므로.


3. 자유의지 그리고 바이오센트리즘


The brain decides to initiate or at least prepares to initiate certain actions before there is any reportable subjective awareness that such a decision has taken place.

- Benjamin Libet



한번 생각해보자. 왜 인간은 이 세상에 와야만 했을까? 모든 종교인은 이 질문을 던진 적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들고, 우울한 세상에 나는 왜 온 것일까? 물론, 그 해답에 대해서 [천체계]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한편, [초현상계]는 그 원리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질문을 바꿔보자.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 물리적 환경에 왔을까?


바이오센트리즘은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통 물리학을 무너뜨린 행위, '관찰'에서 그 답을 찾는다. "모든" 생명체가 One Source Energy임을 주장하는 이 학파는 우주가 의식의 관찰들로 운용되는 곳이라고 믿는다. 즉, 주관적 의식 자체가 (언뜻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서구권에서 취미로 만드는 ecosystem이다. 만일 우주가 상위 존재자의 '이런 것'과도 같다면?


한 가지 차원에서 서로 다른 시간관(timeline)의 공존 가능성을 다룬 영화 '테넷' 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에 관하여 흥미로운 관점을 소개한다. 누구나 한번쯤 도플갱어를 만나면 한 쪽은 죽는다, 는 주술계의 가설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나가 미래의 나를 만나면 분자끼리 부딪혀 파멸에 이른다, 는 설정은 테넷도 유사하다. 그런데 테넷에선 과거의 나가 미래의 나를 여러번 조우한들 죽지 않는다. 바로, 미래의 나가 방호복을 입어 자기의 정체성을 과거로부터 감추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 실체를 가진 우주에 보편적 법칙 하에 적용되는 이 규칙은 주관적으로 인식한 바, 즉 의식에 미래의 자아가 떠오를 때만 기능한다. 만일 자아가 미래의 나를 '그러하다'고 인지하지 않는 한, 제 아무리 (최소한 물리 법칙이 똑같이 적용되는 사정거리 한에서) 미래를 만나도 이 규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주관적으로 발견한 우주의 내용에 따라 달렸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 설정은 아닐까?


그런데, 한번 이렇게 가정해보자. 이미 시나리오는 전부 다 짜여져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몇분 몇초로 돌아간들 그들은 동일한 결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배우들이 캐릭터로서 내 의지대로 결정을 하고 있다고 믿어도, 그들의 의식에 그러한 생각을 부여하는 것은 작가다. 이미,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가 마주치면 죽는 세상에서 그들은 몇번을 마주쳐도 죽지 않게 설정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정 상의 문제다. 하지만, 어떤 매커니즘으로 '하필 그러한 방향으로' 인간은 우주를 의식하게 되는 것일까?


과연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존재할까? 이 문제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벤자민 리벳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벤자민은 실험 참가자에게 버튼을 누르는 등 단순한 과제를 주었다. 물론, EEG기계를 두피에 달아서 전극을 측정했고, '언제 그 행위를 하고 싶었는지' 시간을 기록하게 했다. 그 결과, 그 행위를 하고 싶음, 이 의식에 떠올랐다고 실험 참가자가 기록한 시간이 근육의 실제 움직임부터 200ms 정도 앞섰다면, EEG의 기록은 약 1초의 1/2을 넘긴 550ms 앞섰을 때부터 반응하고 있었다. 뒤이어, 또 다른 연구자들은 FMRI와 뇌에 직접 닿는 Depth EEG electrode 등을 이용한 실험을 진행했고, 유사한 결과를 얻었다. 물론, 이 실험 자체가 유효하고, 건전한 결론을 도출하기에 적합한가, 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단, 이것은 바이오센트리즘의 우주를 대하는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 이미 신은 완전한 에코시스템을 우주에 부여했다. 그 안에서 양자는 이미 규정된 상태로서 주관적 의식 체계를 지닌 관찰자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이란 질병적 환영에 시달리게 된다.




한 가지 글을 마치면서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하고 싶다. Kathleen Vohs와 Jonathan Schooler가 진행한 이 실험은 실험참가자를 세 그룹으로 나눈 후, 자유의지가 있다는 글과 자유의지가 없다는 글, 자유의지와 상관없는 글을 읽게 만든 후 "오류가 있어서 컨닝이 가능한" 수학 문제를 풀게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글을 읽은 쪽의 컨닝 비율은 다른 두 그룹에 비해 현저하게 높았다. 과연 자유의지는 있는가, 없는가? 알 수 없다. 단,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서 그들의 삶은 그만큼 달라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3개의 직업을 갖고도 다섯 쌍둥이를 키운다. 혹은, 7개 국어를 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나는 서른 살이 되어가도록 모국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왜 나는 그들과 다른 시, 공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그들과 같은 24/7을 살아가고 있었을까? 바로, 이것이 매니페스테이션의 핵심이다. 초현상계는 우주를 객관적인 실체를 가진 터라고 규정하는 한편, 어떻게 그것이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에 주목한다. 과연 그것이 타자에 의해서 발생하여 우리를 가두는 매트릭스건, 전통적인 차원에서 해석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건, 혹은, 그저 내 의식 위에 발생하는 환영에 불과하건, 하필 인간의 의식은 그 시, 공간을 점유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관찰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의 출처를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을 해석을 선택할지는 스스로에게 달렸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자유의지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신은, 또는 우주는, 우리에게 그 선택이란 환영을 주었을 리 없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이론도 같이 줬을 리가 없다.)


물론, 나는 이 장에서 소개한 이론들이 각계각층으로부터 매우 다양한 반론에 직면한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각 가설의 유효성 검증이 아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뒤바꿀 패러다임은 언제든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고, -마치 양자적 정보가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인류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선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만일 시, 공간마저 객관적인 물리 법칙으로서 인간 육체 외부에 그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에 따라서 정의되는 것이라면, 왜 보다 더 이로운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비록 모두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지언정, 그것은 '발견'의 문제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숱한 양자적 정보 중에 무엇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라면 조금 더 긴밀하게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게 되지 않을까? 


만일 여러분이 초현상계를 통해 "모든 것은 이미 책처럼 정해져 있다 (적어도, 매 순간 작가가 정한 대사를 읊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딜레마를 발견했다면, 이미 반은 뉴에이지 종교에 대한 공부를 마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과연 뉴에이져는 어떻게 우주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매니페스테이션을 위해 이용해야하는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이것은 종교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 모든 앎의 완성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있는 실천이 요구된다. 


이제, <신>에 대한 공부를 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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