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첫사랑에 실패하는 가 2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 과정이 그 현상을 경험하는 주체의 정신의 공백을 마주보게 하는 끔찍한 과정과 필연적으로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 공백이 본래 그곳에 있었는 지, 혹은 그 상대와 마주치면서 나에게 있었던 무언가 마치 흉터 위에 붙은 딱지를 일시에 떼어버린 것처럼 떨어져나가고, 아직 여물지 않은 연분홍빛의 맨살의 공백을 드러내게 함으로서 종국에 너무나 다치기 쉬운 상태에서 흉터를 그곳에 남게 하는 것인 지, 분간하는 것은 인간 정신이 어떤 형태로 발생하는 지를 논의하는 것처럼 의미가 없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히 그것에 대해서 알 수 없으며, 그러한 길도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 정신이 본래 선한 지, 혹은 선이 교육에 의해서 가능한 이상적 개념인 지를 기원전부터 현대까지 논의해온 철학자들을 보면, 인간 정신의 최초적 형태를 논의하는 게 어떤 종류의 작업인 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논리적으로 해체하기 위해서 명징하게 확정할 수 있는 두 가지 전제가 있는 데, 우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인간 정신의 공백의 깊이에 의거해서 그 충격의 강도가 결정된다는 것이 첫번째 전제다. 이 때, 결코 그것은 물리적인 종류의 공백은 아니다. 설령 인간의 뇌의 어디를 뒤져봐도 벌레가 갉아먹은 듯한 그러한 공백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현대 심리철학자들의 아규먼트를 수용하여 물리적인 것이 곧 정신적인 것이라는 차원의 논의를 반복하는 데 이 글의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두는 데, 사랑에 관한 철학적 담론에서 '정신의 공백'이란 신경다발A가 어떻게 자극을 받는 지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정신이라는 용어 그 자체의 불확정성을 담보한, 필연적, 본능적으로 감각되는 비물리적, 실체적 정신의 차원에서 어떻게 인간 정신의 개인적 불안정성을 외부에 존재하는 상대에서 기인한 충격으로 인해서 직면할 수 있는 지를 논의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정신적 용어’로 이해되야 마땅하다. -만일 정신의 공백이란 용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 놓고, ‘정신적 용어’라는 순환적 오류를 내가 저질렀다면, 그것은 글을 짧게 하기 위한 편의상의 노력임을 감안해주길 바란다. 아무튼, 내가 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인 지 학자에 버금가는 정의를 가진 것은 아니더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뭐, 어느 정도는, ’이라며 자비롭게 어깨를 으쓱거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강도를 결정하는 게 인간 정신의 개인적 공백이라는 점을 논증하기 앞서, 어떤 조건에서 사랑이 발발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물든 감정의 영역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예로 든 사랑의 기술은, 오로지 그것이 선천적 특질과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특권처럼 보인다. 대관절 어떻게 성인에게 인내와 배려를 '기술'로서 이해하고, 습득할 것을 권할 수 있는 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오로지 사랑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을 서로 분리된 곳에서 공유하는 이들의 정신적인 안정성 위에 가능하며, 이러한 정신적 안전성을 획득한 이들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충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보호가 가능한 이는 아동 시절부터 가정 환경에서 인내와 배려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도록 양육받은 이들뿐이며, 성인이 뒤늦게 자발적인 노력으로 인해서 습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로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이들만이 '사랑'이라는 파괴적인 현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매사에 이성을 차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을 방패삼아 사랑에 빠지는 순간조차 거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미상불 그들에게 어떤 것도 거대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만일 상대적으로 타인과의 충격에 대한 감도를 정확한 순간에 명확한 방식을 통해서 비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첫 이별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 심지어 보다 충격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때의 충격의 강도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의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낮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온 정신을 쥐어틀 정도로 파괴적인 그 에너지에 무너지게 되는 그러한 경험은 외려 그들에게 이따금 편안하고, 안전하며, 따뜻한 형태의 감각으로 정신의 내부에 깃든 미지의 영역을 일깨울 뿐이다. 뭐, 약간의 충격은 있겠지만.
그러나 대다수의 폭력적인 가정에서 생존한 이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경험은 두바이의 부유층이 사제끼는 스포츠카의 취미처럼 허락받지 않은 영역에 불과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서 발생하는 충격은 외부의 상대로부터 기인하는 것처럼 보일 지언정, 그 현상의 근원에는 오로지 개인이 그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백이 존재한다. 이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최초의 원인처럼 보이는 그 상대는, 설령 그 공백을 감각하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인자를 담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로지 그 공백을 일깨우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는 우리로 하여금 공백을 마주보게 할 뿐, 공백을 형성하는 주체는 아니다. 한 순간, 그토록 찰나에 그만한 정신적 구멍을 만들 수 있을만한 영향력은 미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최초로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상대가 인간 정신에 채워진 무언가를 정신적으로 앗아간다는 설명보다 본래 그곳에 존재하는 정신의 공백을 드러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게 옳을 지도 모르겠다. 하필 그 상대가, 그러한 시간에, 그러한 방식으로 나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가는 것과 내가 사랑에 빠지는 충격을 경험하는 것 사이에 어떤 종류의 인과관계를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정신적 공백이란, 설령 그 원인을 완벽하게 추적하거나, 그 성질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게 불가능할 지라도, 결국 그 상대를 만나기 전부터 우리 내부에 본래적으로 깃든 것이고, 그 상대는 그러한 공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에서 무언가 떨어져내릴 수 있도록 하는 직접적인 인자 역할을 맡는다는 설명이 옳을 것이다.
이같은 설명은 단풍나무의 성장에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을에 낙엽이 떨어진다는 성질을 나무가 본래 갖고 있었다면, 우리의 정신이 나무고, 낙엽은 그러한 특질을 미리 지니고 있었던 정신의 공백이 될 것이다. 이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상대가 바로 그러한 낙엽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필연적 조건, '가을'이 된다. -과연 인간의 정신적 허점이 자연의 특질만큼 법칙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 에 대한 논의는 나는 하지 않을텐데, 미상불 정신의 허점을 갖지 않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은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것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며, 경험에게 논리적 법칙이 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종류의 나무는 영영 가을을 만나지 못한다. 혹은 매 순간 가을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처음으로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인간과 조우하는 것은 나무와 계절을 비롯한 자연 환경이 하필 그러한 상태로 맞닥뜨리게 되는 정도의 확률적 기적을 담보한다. 그러나 충분히 이것은 보편적인 경험이 될 수 있는 데, 결국, 대다수의 나무의 잎은 먼 우주에 홀로 안착하지 않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자연환경에 의거하여 떨어지기 마련이며, 그러한 '떨어짐'의 특질을 이미 갖고 있고, -혹은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상대는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발발하고, 나태한 자기 반성으로 고착된 정신적 구멍을 가리고 있던 나의 인식의 커텐만 여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현상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가?
최초로 사랑에 빠진 그 순간,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존재는 나의 망막 속에 맺힌 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외부적 사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것은 한 인간, 단순히 거의 모든 사람과 유사한 정도의 육체, 그 이상의 무언가다. 그 순간, 우리는 상대를 단순히 감각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설령 그러한 충격이 감각을 통해서 전해질 지언정, -그가 나를 향해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거나, 단순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을 우리가 시각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감각할 것이므로- 나를 대하는 상대에게 풍기는 인상을 우리는 육체적 감각 이외의 것으로 지각하며, 그러한 인상을 지각하기 위한 조건 자체가 본능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단순 감각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즉, 우리는 육감을 통해서, 저이에게 발견되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지지각하고, 그와 같은 찰나의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 최초로 사랑에 빠진다. 이처럼 외부의 상대와 육체적 접촉을 하지 않고 정신 내부에서 발현되는 물리적 차원의 현상을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경험은 굳이 첫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폭발적인 경험을 하지 않을 때, 보다 우리는 그것을 자세하게 경험할 수 있는 데, 예를 들어, 거의 물리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로부터 나에게 침투되는 형태를 닮은 감각을 느끼는 데, 이 순간, 우리는 그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너무나 강력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물리적인 경험, 마치 가느다란 빛을 닮은 뱀이 우리의 눈을 타고 스며드는 것만 같은 감각을 천천히 느낄 겨를이 없다. 그리고 그 순간, 타인에게 발견되는 순수한 인상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에게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인간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의 정신적 공백의 깊숙함에 내재된 빈곳을 발견한다. 불안정한 정신 위에 존재하는 빈곳의 정체는 비로소 우리 앞에 드러난다. 그리고 세상에,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상대, 최초로 발견한 상대가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제정신으로 그 상황을 버틸 수 있을까. 종국에 우리는 제정신을 잃고 만다. 우리는 그 상대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데 분노하고, 그 상대가 나를,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지 않는 데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그러한 나머지 충동에 정신이 제어되게끔 완전하게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놓아버릴 때도 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마침내 나에게 빠진 것이 무엇인 지 알게 됐는 데, 나의 존재를 완전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발견했는 데,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존재가 나를 거부하고 있는 데, 차라리 이 세상에서 내 존재가 완전하게 버림을 받는들 그것보단 비극적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간은 생애 최초로 해결할 수 없고, 지나치게 파괴적인 비극의 발생을 경험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정신의 안정성에 의거하여 이처럼 충격적인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강도를 경험하게 된다. 정신이 불안정한 인간일수록 최초로 얻는 충격의 강도는 종국에 스스로의 손으로 파국의 결말로 치닿게 할만큼 무시무시할 정도로 깊은 경우도 있다. 한편, 인류 전체가 겪는 동일한 비극은, 최초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연령대는 결코 삶의 느즈막히 찾아오지 않고, 그맘쯤의 대부분의 인간은 불안정한 정신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찰을 심도 깊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나 어린 상태의 우리, -연애 에세이 작성자로 하여금 첫사랑의 실패 원인을 '경험의 부재'로 단순하게 치부하게 만든 연령대의 우리 자신-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전하는 충격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설령 내가 사랑에 빠진 상대와의 견실한 관계가 어떻게든 이루어진들, 그 파괴적인 파동을 이기지 못한 채, 약간이라도 계획이 틀어지면 불같이 성질을 부리는 신경질적인 사람처럼 돼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든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만다.
그러나 인류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 데, 추후에 살펴볼테지만, 이같은 최초의 자아를 세계로부터 거부당한 경험, 즉, 이 세계로 하여금 나를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처럼 보였던 존재와 '나의 실수로 인해서' 분리됐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상실감을 대부분의 정신이 불안정한 인간은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불안정한 정신상태로 말미암아 자신의 실책을 이성적으로 반성하지 못한 채, 차마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상대의 완전한 부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 정신에 존재하는 '공백'의 파괴적인 에너지를 건전하게 해소하지 못한 채 마치 출구없는 내부에서 길길이 날뛰는 핑퐁처럼 그것을 내버려두게 되며, 이는 삶의 점차적인 파괴로 이어진다.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난 인간은 자연스레 이같은 현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사랑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사랑을 하지 않는 것만이 답이라는 순진한 결론을 얻고,- 무의식적으로 경계한다. 한 번 무너진 정신의 빠른 회복을 위해서 쉴새없이 자신을 학대하게 되는 악순환을 거치게 된다. 아마도 눈치가 빠른 이라면, 이쯤에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파악하기 위한 첫번째 전제는 두번째 전제를 파악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담보하는 또 다른 전제는 간단하고, 보편적이다: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