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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기 Sep 02. 2019

기생충 3


기생충 3




코미디를 보면 세상이 코미디처럼 재미있게 흘러갈 수 있다는 점에 수긍하게 된다. 반면, 심각한 영화를 보면 창세기와 요한 계시록에 흐린 날과 우울한 공기만 보인다. 그래서 내 친구 해피맨은 일과를 마치고 취침 전에는 코믹 드라마만 본다. 




세상은 우울한 사람에게 우울하게만 보인다는 원리는 영화 속에서 사용된다. 극은 희극이든지 아니면 비극이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이 둘을 섞어버린다면 마치 햄버거에 김치겉절이 넣어먹는 불편한 맛이 된다. 기생충이 그런 영화다. 영화의 결말은 비극이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는 희극이다. 척하면서 상대를 속이고 유치하게 눈물 펑펑 흘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유머러스한 사람과 어울리면 늘 웃음이 나온다. 진지한 사람과 어울리면 웃음 근육이 퇴화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지한 사람과 소탈한 사람이 모두 등장한다. 내 기분은 우울할 때가 있는가 하면 흐뭇할 때가 있다. 미소를 가장한 심각도 있고 있어 보이려고 진지한 사람도 있다. 




현실적인 영화를 만들어 보려 한다면 비극과 희극이 한 군데 섞어버려야 한다. 그 결과 영화는 관객의 기분을 혼동스럽게 만든다. 죽음과 폭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영화는 엽기적인 결론으로 막이 내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혀 예고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때문이다. 미국식 할로윈 막장 영화처럼 보인다. 




죽음을 가벼운 소재로 받아들인다면 상대를 속이면서  남의 인생에 편승하는 기택 가족들의 허둥대는 모습을 즐길 수 있다. 한 가지 변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먼저 살았던 가정부와 그녀의 숨겨놓은 남편은 부자와 빈자의 경계선에 둥지를 틀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거주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없는 존재이며 지하 밀실이라는 무의식 속에서는 살아있다. 이것은 또 다른 세계의 등장이다. 박사장으로 나타나는 부자의 세계, 기태로 나오는 빈자의 세계, 그리고 가정부 국문광의 세계이다. 남편을 지하에 숨겨두고 주인집 가정부로 일하는 문광의 세계는 코미디가 아니다. 피 묻은 사이코의 냄새가 난다. 지하실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오근세는 자신만의 생태계를 침범하는 모든 타자들을 살해해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기택 가족은 그 역린을 건드렸다. 가정부 문광을 내보낸 것은 사장님 기사를 내보낸 것과 차원이 다르다. 기택은 반지하지만 자기 집이 있다. 쫓겨나면 자기 집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문광에게는 저택이 자기 집이다. 남편이 그 지하실에서 살기 때문에 남편이 있는 곳이 자기 집이다. 실제로 문광은 전 주인의 가정부였다가 연임이 되었다. 박사장보다 더 그 집에 대한 집착이 크다. 문광에게는 주인이 바뀐 것이지 이직을 한 것이 아니다. 자기 둥지에서 강제로 퇴거당한 문광은 기택네와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집을 놔두고 문광네와 기택네가 한바탕 쟁탈전을 치르다가 문광이 뇌진탕을 당하는 피해를 본다. 살아남은 근세는 칼을 들고 기택의 딸 기정을 찌르고 기태의 아내 충숙에게 도전한다. 가정부 문광의 세계에는 유머도 없고 오로지 생존본능과 독만 있다. 건들면 다 죽여!




기택이 문광네와 부닥치는 순간 영화는 공포 스릴러로 변한다. 그전까지 사회풍자극에 가까웠지만 후반부에 영화가 변질되는 인상을 준 것은 빈부격차라는 사회적 문제에 무의식과 욕망이라는 원시성을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어린 새를 먹은 뱀을 어미 새가 발견하고 뱀의 머리를 쪼아서 피바다를 만들어 보이는 잔인성이 원시적 세계다. 




박사장의 원시적 욕망은 부와 교양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 하부구조는 가정부. 기사. 가정교사 등이 궂은 일을 담당하므로 원초적일 필요가 없다. 자제와 절제, 세련과 청결은 재산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미덕이다. 기택의 아내 충숙과 전 가정부 문광의 남편 근세가 싸우는 동안 박사장은 차키만 찾는다. 박사장의 눈에 가정부 기사 등은 자기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하부구조를 이루는 자원들이다. 박사장은 빈자의 세계에 관심도 없고 문광의 어둠 컴컴한 무의식의 세계는 바로 자기 집 지하임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은 가정부 문광이며, 기택네는 부잣집에 가정교사 기사 가정부등을 취업하고 나서야 목격을 했고 게다가 지하 밀실의 존재를 깨닫고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피바다 생일파티 사건 이후 주인공 기택은 변했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을 마지막 세계인 지하 밀실로 잠겨버렸다. 빈자가 부자가 될 수도 없고 가난하게 살면서 자식의 죽음을 막지도 못하고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감금시켜버렸다. 살인죄에 대한 형벌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 아들 기우가 언젠가는 부자가 돼서 지하에 갇힌 아버지를 구해내리라고 마음먹은 것은 그래도 나이가 어리니까 생각할 만하다. 하지만 중년의 기택은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남의 두통수를 치고 사기를 칠 수도 있지만 딸을 희생하면서까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는 것은 수용할 수 없었다.




영화의 질은 허구성과 단순함의 구조를 깨고 사실성과 세계의 복잡함을 드러낼 수 있을 때 높게 평가된다. 단지 가난하게 사는 것은 구질구질한 거라는 등,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등, 이해 안 되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병자 취급하는 단순한 사고에 머문다면 박사장의 단일 세계 수준이고 부자에게 아부해서 먹고 살려는 영리함이 초래한 결과만을 본다면 마르크스적인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 양극 구조에 머무는 것이다. 




영화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갔다.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숨겨진 욕망의 무의식 세계까지 조명함으로써 드 계급의 속의 위선과 본질에 문제제기를 했다. 관람자들이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는 것은 세상에는 유리수 정수 무리수로만 구성되고 있다는 실수의 세계에 x자승이 =1이 되는 허수가 존재할 수 있다고 16세기 


에 데카르트가 발표했을 때와 같은 이유다. 




송강호 주연의 2007년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가족들의 인간적으로 우아한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더러운 일을 해야 하는 조폭의 고민이 나온다. 박사장은 돈으로 우아함을 유지하고 기택은 사기로 우아한 삶을 쟁취하려고 하고 마지막으로 가정부 문광은 정신분열로 얻으려고 한다. 그녀는 자기를 교양 있는 귀부인으로 믿고 있다. 저택과 자신이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부엌을 장악하고 주인집 애들의 교육에도 간여하고 자기 집처럼 모든 집안일을 관리한다. 그중에 하나가 지하실에 숨겨둔 남편이다. 이 집에 기거하는 모든 사람들을 관리하고 지속 가능하게 유지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자기 세계이다. 그녀의 세계는 우아하지만 비밀스럽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한 주거공간에서 서로 우아하게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영회는 기발하게 표현했다. 알려진 구조는 해체되지만 다시 제자리를 찾아서 그럴듯하게 존재한다. 모두가 잠든 밤에 해체된 부정당한 세계가 신음소리를 낸다. 바로 지하 밀실에서 주인공 기택이 두꺼비집 전기 스위치로 세상 밖으로 모스 부호를 보내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모르는 저 깊은 골방에서 모스부호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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