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화의 힘은 강력하다. 요즘 유일하게 보는 괜찮은 드라마가 <가족입니다>이다. 핵심 사건은 가장인 57세 아버지가 산행 중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남자는 22세까지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지워졌다. 당시 신혼생활 중이었던 아내만 기억하고 그 후 출생한 자식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남자는 지난 35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말로 조합을 해보니, 자신이 아내에게 못되게 대하는 끔찍한 남편이었음을 알고 당황하게 된다. 기억상실이 되면서 그 기억과 함께 붙어있었던 감정도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고민도, 집착도 없어져버린다. 오직 남는 것은 22세 때 막 신혼 생활하던 당시의 감정들 뿐이다. 세상이 단순하고, 알콩달콩하기만 하다.
자신이 살아온 생애도 남에게 전해 들으면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객관이란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인공인 극 중 둘째 딸 은희가 처음 겪은 것도 명상수련에서 과거체험을 하면서부터였다. 살아오면서 가장 길었던 하루를 회상해보라는 인도자의 안내에 5년 전 사건을 떠올리게 되고 그 날 하루 겪었던 일을 유령처럼 바라보게 되면서 자신 때문에, 또는 주변에서 가족들이 각자 처지에서 당하는 감정들을 차례로 보게 되었다.
세월은 약간의 객관화를 도와준다. 당시는 사건 속에 깊이 빠져서 간과했던 것들도 사랑도 미움도 진정되고 나서 바라보면 안쓰럽게 혹은 후회되는 일들이 표현에 나타난다. 가장 강력한 객관화 조건인 기억상실에 걸린 이 중년 남자는 전혀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기억을 지우면 감정도 사라지고, 새로운 기분에 빠진다. 따라서 망각은 샤워하는 것과 같다.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감정이고 특별한 사건이다. 그 사건은 자존심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잊히지 않고, 단단하게 나를 과장시켜서 자기중심적으로 붙잡고 있다. 나를 부둥켜안고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거나 해치는 주변에 대한 적대감,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중년 남자가 아내에게 화를 내고 퉁명하게 대한 것은 그 서운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 감정이 기억상실로 사라지고 나니 남자는 아내를 숨 쉴 때마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신혼 초기, 또는 연애시절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살면 자기 짝이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뭘 해도 그는 젊은 당시 그 모습이니 말이다. 기억은 지워버리고 남으로부터 자신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나를 객관화시켜서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드라마를 보면서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