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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기 Jun 21. 2020

처절한 시기에 우리는 남이다


관계는 문안한 시기와 처절한 시기에 따라 민낯을 드러낸다. 미국 인구의 약 12%가 흑인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두가 미국인이지만, 처절한 시기에 백인들로부터 흑인은 차별을 받는다. 




이런 경우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도 나온다. 남편 이태호의 아들 준영이 새엄마 여다경의 집에 같이 살게 된다. 다경은 자신이 준영을 잘 키우겠다고 데리고 오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다경은 준영을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좋은 옷을 사주면서 잘 지내보자고 보듬어준다. 문안한 시기이다. 




파티로 집안에 손님이 많이 온 날 여다경의 딸의 울음소리가 난다. 다경은 부리 낳게 달려와서 같이 있었던 준영을 보고 소리친다. 다경은 준영이가 딸을 때리거나 울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놀란 준영이가 변명을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준영은 울면서 엄마 지선우에게 전화해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한다. 처절한 시기이다. 




너는 이제 우리 팀이야, 가족이야, 같은 시민이야라고 하지만 처절한 시기가 오면 바로 뒤로 젖히고 밀쳐내고 내버린다. '우리'라는 테두리는 공감의 울타리에 머무는 관계이다. 다경에게 딸은 '우리'라는 테두리에 머무는 연장된 '나'이지만, 남편의 아들은 '남'이라는 테두리에 머물기 때문에 준영의 마음에 거의 공감하지 못한다. 의도적으로 노력해보기 전에는. 




사람들은 '나'라는 테두리를 쉽게 주변으로 확산해서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기도 하는데, 집단생활을 오래 해왔던 전통적인 사회가 그렇다. 어떻게 하다 보니 '나'는 오로지 '나'에만 머물 때 같은 가족, 오랜 친구일지언정 상대의 '고통'에 공감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럴 때 처절한 시기가 오면 나만 살리고 나머지는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랑 비슷한 사람들을 '나', 확장된 개념으로 '우리'에 포함시킨다. 외모, 말투, 직업, 소득, 성격, 출신지역 등등, 쇼윈도에서 마네킹을 슬쩍 보듯이 자기와 비슷한 혹은 호감이 가는 대상을 '우리'에 포함시켜 버린다. 이런 대충 하는 과정이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 '남'이란 내가 공감하지 않는 대상 전부를 칭한다. 




어떤 사람이 나를 '남'으로 대하는지를 알려면 나를 보는 눈빛이나, 나에게 말하는 태도를 보면 된다. 무심히 바라보는 눈빛, 자기 말에만 급급한 태도, 내 말을 상대가 짧게 결론 내려고 하는 태도, 이런 사람은 나를 공감하지 못하고 '남'으로 대하는 사람이다. 나를 지극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내가 하는 말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말 추임새를 넣어주는 사람은 마음을 열고 나를 안아주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같은 사람이 공감을 해주는 때도 있고, 바쁘다고 무시하는 때도 있다. 




타인과 우리의 경계선은 종종 춤을 추기도 하고 사안에 따라서 변경되기도 한다. 평화로운 가정, 일터, 사회가 되려면 우리라는 테두리가 확대되고 타인의 세계가 감소되어야 한다.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전달되는 집단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온기가 있다. 반대로 '엄마가 내 고통을 알아', '당신이 내 입장을 헤아려 보기나 했어' 하는 장소에는 싸움만 있게 된다. 처절한 순간이 오면, 죽게 내버려 둔다. 




고통이 심하면 가까운 사람을 타인의 범주에 넣어버린다. 영화 <기도하는 남자> https://youtu.be/l3-88zn-fcc 주인공인 개척교회 목사는 장모의 수술비 5천만을 마련하려다가 협박, 강도모의까지 하게 되고, 사모인 아내는 고교 동창에게 하룻밤 몸을 파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목사는 절망과 혼돈 속에서 이 모든 것이 장모의 수술비에서 시작된 고통이니 장모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고, 아는 외국인 노동자를 시켜서 청부살해를 시도한다. 처절하면 장모는 '타인'으로 치부된다. 오로지 내 가족만 살려고 방해가 되는 장모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전날, 자신의 생일이라고 장모가 음식을 장만해주었는데도 말이다. 




살인은 막았지만, 장모는 교통사고로 죽게 되고 마지막 순간을 목도한다. 숨이 끊어져가는 장모는 사위가 119에 신고하려고 하자 손을 잡으며 말린다. 목사는 장모를 남으로 생각했지만, 장모는 목사를 사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딸과 함께 앞으로 잘 살아가야 할 가장으로 말이다. 이것으로 남의 죄를 대속하여 죽은 예수님을 오버랩시킨다. 예수님은 자신을 남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면서 하나님이 저들을 용서해주기를 기도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남이 아닌 '우리'로 인식했다. 




Black live matter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남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굳이 흑인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 땅에 사는 남미 사람들, 아시안들 모두의 삶이 중요하다는 말이 되어야 한다. 한 가정에서부터, 국가 그리고 전 세계까지 평화롭게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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