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시간여행이라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나에게 '영어'와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한다. (아니했다.) 물론, 교육에 관심 많은 이모 덕택에 잠들 때는 한국어와 영어 단어가 번갈아 가면서 나오는 라디오 테이프를 듣고 잠들었으면서도 왜인지 영어에 대한 첫인상은 4학년 학교 수업 시간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밤이면 밤마다 영어 단어를 들어 놓고선, 4줄이 한 세트인 영어 공책에 영어 단어를 적으면서 한 생각이 아직도 어이없었다.
'아, 외국은 한글을 쓰는 게 아니라 알파벳을 쓰는구나.'
그러니까 나나 외국인이나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고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적고 외국인은 'An-Nyung-Ha-Se-Yo'라고 적는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이렇게 ‘안녕하세요.’를 적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영어 잘한다고 한순간 생각을 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러니 결론은 밤이면 밤마다 들었던 라디오의 낙타, camel. 방 벽에 붙어있는 A Ant는 어디다 팔아먹고 그 4학년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직도 신기할 뿐이다. 물론 밤이면 밤마다 들었던 그 다양한 내용 중에서도 낙타, camel만 기억에 남은 것도, 그마저도 스펠링을 여태까지 모르고 있어서 사전에서 검색했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지금 와서 다시 시작할 수 도 없는 나의 영어 조기 교육의 결과는 명확하게 실패였다.
'내가 언어 공부를 하며 느꼈던 생각, 경험에 관한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영어를 초등학교 4학년 처음 접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재의 내가 영어를 못한 이유를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씩 과거의 방을 떠올리면 4학년보다 이른 시기에 Q Queen이 적힌 코팅된 4절지 크기의 포스터가 방 벽에 붙어 있었고 밤이면 밤마다 계모라고 부르짖고 낙타라고 말하는 게 웃겨 동생과 낄낄 댔던 라디오 테이프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엄마는 내가 인지하지 못할 시기부터 투자하고 있었던 거다. 이렇게 또 남탓 하려던 불속성 효녀. 불속성 강화 +1이 된다.
초등학생 때의 어처구니없는 발상은 저것 하나가 아니다. 초등학생의 생각은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확실히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통일과 관련된 수업에서 '아, 그래도 지금은 통일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던 때도 있었다. 분명 통일과 관련된 수업을 듣고 나서 말이다. 아마 그땐 분단이라는 상황이 불안정해 보이고 그런 무서운 상황이 현재 진행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이 튀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는 미국이 '美國' 아름다운 나라라 그 명칭이 우리나라를 부르는 다른 명칭 중에 하나라서 뉴스에서 미국이라고 언급할 때 우리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다는 친구도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고학년 3년 영어 공부를 했음에도 중1 첫 영어 듣기 평가에서 'but'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기도 했다. (그래서 그 1번 문제를 틀렸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역접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엉뚱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초등학생 시절은 모르는 척하고 감히 괘씸하게도 엄마 탓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어쩌면 내가 지금 언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다 누군가의 희생과 보살핌 덕분에 이렇게 언어를 취미로 공부할 수 있도록 컸는데,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되짚기 전까지 남 탓만 할 준비를 했다. 그냥 웃긴 정도의 가벼운 글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을 마주하고 떠오르는 다른 기억들은 반성문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다.
최근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가족적금이랑 따로 엄마에게 보낼 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던 통화였다.
"엄마가 맨날 돈 달라는 전화만 하네."
그냥 울컥했다. 저 전화를 받고 있을 때, 나는 서울의 한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사전 녹화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고 있다. 돈을 받아야 할 건 엄마인데 도리어 엄마가 나한테 미안해한다. 10년 전의 나는 한 달에 한번 엄마한테 전화했었다. "엄마 나 용돈..."이라며 나름 1-2시간의 고민 끝에 건 전화였다. 우스갯소리로 그때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입으로는 가볍게 분위기를 전환하고 마음은 조금 무거워진 채로 전화를 마친다.
올해 방영한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떠오른다. 여유롭고 편안한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삶. 여주인공의 엄마는 그런 삶을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게 살고 있는 딸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본다.
엄마가 말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엄마가 원했던 삶을 산 모습을 보여줬던 드라마의 모녀처럼 나의 성격이, 취미가, 취향이 온전히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어딘가 영향을 받은 건 없을까? 어쩌면 같은 장녀로 엄마와 같은 취향이 있을지 않을까? 한편으론 엄마의 취향 하나 바로 떠오르는 게 없는 게 또 못났다 생각을 들게 만든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엄마의 죽음과 시간여행을 통해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해 간다. 여주인공에게는 시간여행이 필요했겠지만 나는 아니다.
살가운 딸은 여동생이 독식하고 있다. 시작이 어렵다고 아닌 척 엄마한테 전화해 본다. 언제 어색했냐는 듯 주절주절 말만 잘 나온다. 여태껏 왜 무소식이 희소식인 딸이었나 싶을 정도로. 전화가 끝난 뒤엔 다시 어색해지지만 이런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