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첫 업무. 체크 하나에 안심, 체크 둘에 오류 제거
철이면 한 번씩 진행하는 대청소. 베란다 선반장위에 쌓인 강렬한 색상의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의 나라면 절대로 손도 안 댔을 색의 다이어리는 내 첫 직장에서 나눠준 다이어리였다. 그렇게 나는 청소 과정에서 절대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을 기어코 실행하고 만다. 다이어리를 하나 들어서 근처에 앉는다. 그리고 적당한 페이지를 펼쳐본다.
그 다이어리에도 표가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표가 만들어지기 전 단계의 원형이자 내가 거진 2년 동안 붙잡고 있던 표.
그 표에 적힌 날짜나 내용 하나하나를 읽어본다. 기억 속에서 이 표로 체크를 시작한 건 업무를 시작하고서 꽤 시간이 지난 뒤로 기억하고 있었는 데, 2월에 입사한 나의 수첩에는 같은 해의 3월 발매 앨범들이 수두룩하게 체크되어 있었다.
"네, OO엔터 OO입니다."
아직 저 멘트가 익숙하지 않았던 첫 직장. 계약직이었지만 직장인이라니! 새로운 신분 아닌 신분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젠 더 이상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곳이었으니까. 음원유통사의 음원 DB관리. 발매 전 음원을 들어볼 수 있다는 업무는 흥미로움과 동시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멜론, 지니, 바이브, 벅스, 플로.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이름들인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 음원을 유통하는 회사가 나의 첫 직장이었다. 그 회사에서 내가 담당한 업무는 가장 기초적이지만 꼭 필요한 업무였다. 물론, 큰 능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계약직이었을 테다. 유통사는 차별 없이 저 모든 플랫폼에 음원을 유통했기 때문에 내가 처음 적응해야 할 업무는 각각의 플랫폼 CMS에 음원을 등록하는 일이었다.
업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앞서 음원의 DB를 오류 없이 잘 정리했다면, 앨범 자체의 코드에 의해 자동으로 입력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각 플랫폼마다 자동으로 처리되는 부분과 내가 추가로 입력해야 하는 정보값이 달라서 꼼꼼한 확인은 필수였다.
일주일 정도의 업무인수인계, 담당 사수분의 검토과정을 거쳐서 온전히 내가 해당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퇴사까지 해당 업무를 담당했고 나는 그 앨범 하나하나마다 표에 체크 표시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 표는 시기에 따라 발전했다.
처음 체크를 시작했을 때는 '나를 믿지 못함'이 컸다. 워낙 반복적인 업무였기 때문에 약 5개의 사이트에 앨범을 등록하고 나서 행여 틀린 게 없는지 5개의 창을 켜두고 앨범명 확인, 아티스트명 확인, 가사입력 확인... 이러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멍 때리고 있었고 그 멍 때림은 불확신으로 이어졌다.
'어? A사이트에서 B 확인했나?'
그럼 나는 다시 탭을 옮겨 그 부분을 확인한다. 대부분 제대로 입력되어 있었지만, 더러 정말 확인 안 하고 넘어간 경우가 있어서 이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입사하면서 받은 회사 다이어리를 펼쳤다.
앨범명을 적고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의 CMS이름을 적고 각 CMS별 체크해야 할 내용을 적었다. A플랫폼은 대표곡, 요청사항, 발매일, 시간, 가사, 음원 총 6개를 체크해야 해. B플랫폼은 앨범타입, 서비스, 장르, 요청사항, 대표곡, 가사를 체크해야 해. 등등 체크해야 할 내용을 적고 각 체크해야 할 항목의 개수를 확인했다. 한번 항목이 정리되니 그때부턴 'V' 체크표시를 시작했다.
이 형태는 꽤나 오랜 시간 유지된다. 이미 발매된 앨범들이지만 입사 첫해 3월부터 8월까지 참 꾸준히 체크표시를 입력해 나갔다.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구분이 어려워 처음에는 검은색, 다음 앨범은 붉은색으로 기입했다. 그러다가 검은색 볼펜으로 통일하고 구분을 위해 노란색과 녹색 형광펜으로 번갈아 표기했다.
이때부터 V표시와 함께 제대로 입력했는지 내용을 옮겨 적어가며 체크했다. 8월 12일에 발매하는 OST 장르의 싱글 앨범이면 [싱글 8/12 V 1 OST]라고 확인이 끝나면 다음 CMS로 넘어간다. 싱글앨범, 8월 12일 발매, 대표이미지 확인, 1번 트랙 타이틀, 장르 OST라는 의미였다.
18시 발매는 주요 건이 이어서 그런 앨범들은 앨범/아티스명 하단에 한번 더 체크할 수 있도록 각 플랫폼 앞자리 한 글자씩을 적어두고 확인 후 'O'로 표기했다.
한 앨범당 2줄짜리의 기록은 내가 업무를 적응하고 더 꼼꼼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싶다는 욕심에 진화하기 시작한다. 1행 1열은 부조건 아티스트명과 앨범명이 들어갈 칸을 만들었다. 매번 OST, OST, OST라고 적는 건 효율이 없는 것 같아서 앨범에 대한 정보를 앨범 정리하면서 확인 겸 미리 기입할 수 있게 칸을 만든다. 실제로 확인 작업할 땐, ⓜ V V V V V V 정도로만 체크하고 빨리 넘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정보란을 만들었다.
업무를 진행하고 속도가 붙다 보니 실수가 그에 따라 생겨났다. 앨범 소개서를 붙여 넣기 하다가 중간에 잘리거나 앨범 소개서 란에 가사가 들어가는 일이 벌어져서 이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소개서와 가사의 끝단 어를 적는 칸을 만들었다. 마지막 확인 전 소개서 파일을 열지 않아도 점검할 수 있었다.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표를 복잡하게 만들어 간다.
이 형태가 내가 퇴사까지 사용한 체크리스트 표의 형태였다. 청소의 청소를 거치며 버린 줄 알았는데, 책상과 서랍 사이의 공간에 숨어있다가 최근에 자리를 옮기며 발견할 수 있었다. 노란색 테두리는 주요 앨범이라는 의미, 녹색은 다른 앨범과 다른 요소가 있는 경우에 놓치지 않기 위해 표시했다.
이때부터는 발매 공지 메일링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면서 공지를 진행했는지 여부와 서비스 범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체크할 수 있도록 체크리스트에 추가했다. 앨범 정보의 붉은색 펜은 공지메일에 앨범 정보가 제대로 기입되었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활용했다.
수많은 'V' 표시는 별거 아닌 한 획이다. 내가 정말 꼼꼼하고 완벽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절차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표에 발매되는 하나의 앨범정보를 정리해서 담고, 각 사이트에 등록하고 다시 확인하는 절차는 내가 아닌 내 일을 꼼꼼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웃긴 말이지만 이 표를 통해서 '나'라는 인간은 꼼꼼하지 않아도 나라는 사람이 하는 '일'에 있어서는 꼼꼼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가 퇴사할 때까지 총 2년간 발매된 모든 앨범 정보를 입력하고 체크했다. 멈춰도 되는 일일정도로 어느 순간부터 오류가 크게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앨범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곡이 나로 인해서 피해 보는 일은 없게 만들고 싶었던 게 컸다.
새삼 이미 지나간 내가 과거에 남긴 기록을 보며 내가 정말 끈질기고 지독한 인간이구나 싶다. 하지만 이 기록을 보고 누가 나에게 끈기 없는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제법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 데, 내 일에 있어서만큼은 책임감 있는 모습을 이 수많은 표시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쩌면 나를 정말 박하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청소도 신나게 추억 여행을 떠났다 돌아왔다.
회사에서 받은 수첩은 가죽으로 덧대여진 다이어리라 재활용이 어렵다는 진짜 이유를 기록이라는 포장지로 버리지 않고 있던 물건이었다. 묵묵하게 체크표시를 하던 나는 어느새 또 다른 직장에서 또 다른 푸념을 속으로 삼키며 또 다른 표를 그리며 꼼꼼한 사람으로 살아보려 발버둥칠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마냥 지루해 보이지 않는다. 작은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뿌듯함을 봤으니까.